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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

그들이 너무 많은가?

그들은 언제나 너무 많다. 그들이란 적으면 적을수록, 더 낫게는 아예 없어야 좋을 사람들이다. 반면 우리가 충분한 적은 결코 없다. 우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사람들이다. 맬더스의 예언이 등장해 논란이 일었던 사회에서 인구가 증가하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물자는 점점 더 부족해  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노동력과 전투력 -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이 희소성이라는 재난에 대처하는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인 것처럼 보인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힘이 크다는 것을 의미 한다. 큰 힘은 큰 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큰 땅의 획득은 큰 부를 의미한다. 이어 큰 땅과 부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여지를 의미했다. 즉 인구과잉에 대한 치료법은 더 많은 인구라는 것이 그것이다.

 

인구과잉이란 경제지표 달성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코드명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수는 지금까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이들은 끊임없는 비용을 상승시키지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다. 생산자 사회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도 현재와 미래의 수요가 흡수할 수 있는 상품을 전부 생산할 수 있으며 더 빨리 더 많이 이익을 내며,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으므로 이들의 노동력은 전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 사회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결함있는 소비자들이다. 즉 소비자 시장의 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돈은 없는 반면, 이윤을 추구하는 소비자 산업이 부응할 수 없고, 또 다른 종류의 수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소비자는 소비자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따라서 결함 있는 소비자는 가장 성가시고 비용이 많이 드는 부담이다. 단지 경제 발전의 부산물 일뿐인 인간쓰레기의 생산은 비인격적이고 순전히 현대 사회가 가진 모든 특징을 보여준다.

 

사회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박탈당한 가운데 생물학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획득해야 하는 힘겨운 작업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새로운 사회의 설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인지 아니면, 태만 때문에 비참해진 것인지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깊이 생각하고 음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거부 당했다는 느낌을 갖고, 성나서 격분하고, 원한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운다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해봤자 헛수고라는 걸 배우고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판결에 굴복한다면, 그런 감정들을 효과적인 행동으로 재창조할 있는 길을 찾기는 너무나 어렵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잉여인간들은 어떻게 해도 승산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잉여인간들은 단순히 이질적 존재가 아니며, 사회의 건강한 조직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이자, 우리 생활방식과 우리의 가치를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더 이상 일할 것을 요구 받지 않는 잉여적 존재의 생산은 지구화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잉여인간들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영역에 배제된다. 작동중인 현체계로 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곧 나머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고, 그들은 종종 말 그대로 말문이 막히게 된다.

 

인구추세 분석가들은 거주 밀도와 인구과잉 현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구과잉의 정도는 해당 국가의 보유자원이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 수와 인간적인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역환경의 잠재력에 기초해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가 기록적인 인구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수 많은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의 생명유지 체계에 끼친 인류의 영향은 단지 지구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수로만 결정되는게 아니다. 이는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전혀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즉 주된 인구문제는 부국들에 있는 것이다. 사실 부자가 너무 많다. 저 부자들, 즉 지구자원의 무관심한 소비자들 이야말로 지구의 진정한 기생풍, 등쳐먹는 자, 가식자가 아닐까?

 

쓰레기를 유용한 생산품으로부터 분리하는 거시적 설계는 객관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설계자들의 선호를 나타낸다. 현세의 권력자들은 소비시장에 나온 신상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손아귀에 쥐고 놓지 않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취약하고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러한 상태로 유지해야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인간은 인체의 취약성을 가지고 있고, 미지의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다. 인간존재에 내재하는 불안전성을 먹고 사는 현세의 권력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그에 맞서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할 위협을 창조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을 창조하는 일에 성공하면 할수록 보호에 대한 수요 또한 그만큼 더 늘어나고 강화된다.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주된 존재 이유다. 그리고 모든 정치권력은 그러한 수요들을 정규적으로 갱신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반적인 현대사회에서 존재의 취약성과 불안전성 그리고 심각하고 벗어날 길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조건 아래서, 삶의 목적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은 삶의 여정이 시장의 힘에 노출 됨에 따라 한층 더 명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