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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 린다 그래튼 지음, 조성

탐욕스런 소비자 vs 열정적인 생산자(2)

전환한다는 것은 행동을 취할 마음을 먹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1년간 사회체험과 연봉을 맞바꾼다는 말이며, 독립적인 소기업가가 되는 대신 여기에 따르는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할 시간을 내기 위해 유연근무제를 택한다는 의미다. 선택은 쉽지 않다. 잠에서 깨어나면 순간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닌 학교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는 방법도, 선택의 결과를 이해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선택을 할때 선택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억누르며 모순된 점을 논의하지 않으려 할 때, 일에서 누릴수 있는 다채로움도 많이 줄어든다. 주위 사람들 전부가 금전적 보상으로 성과를 보상 받는다면, 그 수단이 내게 큰 동기가 되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같은 수준의 인정을 원할 것이고, 조직도 금전이라는 수단으로만 성과를 인정할 것이다.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면 의욕이 크게 꺽일수 밖에 없으므로 결국 금전적 보상을 올바른 성과인정 수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과 시간 보내기를 하면 경력과 보상에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고, 고객이나 동료와 시간을 같이 하기로 하면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생긴다. 선택의 책임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 전가할 수도 있지만 이는 기업과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고,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지 않는 이른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깨달음은 삶의 어떤 부분이 폭발했을 때 찾아온다. 폭발하는 부분이 결혼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아이들일 수도 있다. 일하는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며, 그런 선택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결정되고 다채로움과 존재의 의미, 일의 체계가 만들어진다. 주말에도 일을 하고 아이들과 일하는 시간을 줄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큰 차나 집을 사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다. 자유의지를 발휘하려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다른 선택은 얼마든지 있다. 일의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가고 싶다면,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대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지난 일과 미래에 대한 선택은 대부분 기업이 알아서 했다. 하지만 위계적 지휘구조, 상의하달식 의사결정, 유연하지 못한 인사관행이 힘을 잃으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선택하고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때면 딜레마와 두려움, 죄의식을 만나게 된다.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은 무엇인가? 기업이 아닌 개인의 열망과 욕구, 그리고 역량이 미래의 틀을 만들게 된다미래에 만들어질 동기부여틀은 금전적 보상과 소비를 중시하는 전통적 거래에서 경험을 중심에 두는 거래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나한테 의미가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일의 미래가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일의 미래와 다를지 모른다.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일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2004년에 개인의 선택이라는 개념은 시대정신과 맞지 않았다. 경기도 호황이었다. 기업이 직원 개개인의 특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직원들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 없었다. 풍요의 시대였고 자기 성찰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수직적으로 의사소통 하는 대신 수평적으로 소통한다. 직원들이 일에서 원하는 것이 똑같이 않으며 개인마다 다르다. 유연근무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직원이 놀이하듯 즐겁게 일하기를 원했지만, 또 어떤 직원은 정당한 보수만 보장된다면 일의 종류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직원들이 내리는 선택은 그들의 개인적인 환경, 예컨대 아이들이 어린지 아닌지에 따라 다르며, 개인의 열망과 개성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직원들의 특성을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사실은 선택의 폭이 넓어질수록 직원들이 내리는 선택도 그 만큼 다양해진다. 나한테 중요한 의미가 있고, 기꺼이 선택하고자 하는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일에 대한 시각이 개개인의 욕구를 더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옮겨가며, 나아가 이런 욕구를 인정하고 충족시켜 줄 일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추기 시작한다. Y세대의 특징에서 이미 보았듯이 단순히 돈과 소비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주된 동인으로 거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결과를 분명하게 이해할수록 균형잡힌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만들게 된다. 일의 미래를 모색하면서 집이나 자동차처럼 전통적인 거래의 중심을 차지하던 고가의 물건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전통적인 거래목표에서는 구매하는 물건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정체성을 정의해 주었다.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거래목표가 등장하면서 소비하는 물건보다 생산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일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지배적인 열망이던 풍요로운 소비가 언젠가는 그 자리를 내놓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보자. 다른 종류의 열망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훌륭한 가족생활, 친구들과의 깊은 우정, 의미있고 신나는 일, 또는 되살아 난 창의성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가장 중요한 열망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산업혁명 이후였다. 산업혁명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 일하는 장소, 근무시간에 대한 개념, 일하는 이유를 바꿨다. 작업의 기계화는 노동자들을 기계처럼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하면서 욕구도 기계적인 것으로 바꿔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근로자도 기계처럼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이면의 진실이 깔려있다. 

 

자신이 하는 선택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감정을 솔직히 내보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드는 건강하고 자연스런 심리상태다. 그러므로 회피 하거나 부인 하려는 감정에 빠지는 대신 딜레마 속에 자신이 발전할 기회가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조직생활의 양산품도 기업이라는 기계에 속한 톱니바퀴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선택하고, 그런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능력이 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감정과 단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안전지대 너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용기있게행동해야 한다. 일반적인 틀에 자신을 가두는 대신,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중시해야 하며, 자신만의 생활방식을 추구하고, 자신이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자기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과 소속된 조직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놀이터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와 '미래에 대한 이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