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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우리가 기억하는 기억은 진짜 기억인가?

만일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뒤를 돌아 보았을 때 텅 빈 공백만 펼쳐지거나, 다른 누군가가 남긴 자국만 보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를 만드는 것이 있다면, 일관된 진정성을 느끼게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억이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우리의 기억이 사실인지를 허구인지 밝히는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놀라운 실험을 고안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암시에 의해 잘못된 것을 믿도록 유도될 수 있다고 로프터스 교수는 말한다. 그녀는 진실에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나는 이야기 진실, 또 하나는 실제 벌어진 진실이지요. 우리는 실제 벌어진 진실의 앙상한 뼈대 위에 살과 근육을 덧붙여 우리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관념속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 진실이 사라지고, 이야기 진실이 시작되는 곳에서 혼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 우리가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옳은 것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허술한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거짓 기억이 주관적 진실에 스며들어 혼돈의 세상에서 허구가 진실 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해마는 자신에 관한 세부사항을 기억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을 의식의 핵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두뇌의 다른 부위에도 새로운 기억 시스템이 존재했다. 밀너는 이것을 '절차적 기억' 또는 '무의식적 기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령 우리가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해도, 자전거를 타거나, 담배를 피우는 방법은 알고 있을 수 있었다. 기억력을 상실한 사람이 자신의 나이를 모르고,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오랫동안 생활한 지역에 데려다 놓으면 결국 자기 집을 찾아 온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두뇌 속에 독립적인 기억 시스템이 다수 존재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운동능력처럼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절차적 기억, 사실을 기억하는 의미론적 기억,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기억하는 서술적 기억 등이 존재했다.

 

용불용설이 옳았다.  우리가 새로운 임무를 연습할 때 마다 두뇌 속의 그 임무를 실행을 관장하는 뉴런들의 관계망이 더욱 끈끈해졌다우리가 기억을 단련시킬수록 우리 자신에게 몇 번씩 명령을 내리게 되고, 두뇌 안의 특정 시냅스 사이에 전기 화학적 대화가 강해졌다. 우리 집에 작은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처음에 내가 피아노를 쳤을 때 건방 위의 손가락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매일 연습을 하고 나니 몇 주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두뇌 속의 고리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나는 피아노를 연주함으로써,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뉴런이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것이 기억이 의존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매우 관계적이다. 그것은 낯선 사람끼리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서로의 문에 다가가는 편안한 길을 찾아주는 대형 미팅 사이트와 같다.  매일 우리 몸 안에는 엄청난 양의 감상과 잡음, 느낌과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면 온 정신이 잡동사니의 바다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지나간 과거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속에 기억이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한다.  우리는 항상 기억이 우리의 존재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기억은 이야기며 우리 존재의 지속성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기억력 감퇴를 치료하기 위한 약이 우리의 기억을 너무 좋게 만들어 모든 기억이 우리를 엄습하면 어떻게 하지? 자신의 모든 전화번호, 친구가 죽은 기억, 아버지의 냄새, 오래전에 창틀에 쌓여 있는 먼지까지 모두 떠오르면 어떻게 되는가? 누가 이것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기억력을 좋게 하기 위해 개발한 약이 오히려 과거 속에 갇히게 만들어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기억력 강화제에는 수만 가지의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과거가 기억이 쏟어지지 않더라도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 하나하나가 다 기억되어 머릿속이 난장판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두뇌 속에 망각능력이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 때문이다. 그것은 진화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이테크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퇴적물을 던져버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 속에 갇혀 살게 하거나, 미래의 일로 초조하게 만드는 시끄럽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난 일을 기억하거나, 앞날을 향해 가느라 바빠 현재에 거의 집중하지 못한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기억이다. 모든 기대는 과거 학습을 토대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거의 살지 못한다.  어떤 약도 노쇠현상을 무한정 연기하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탈근대를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탈인간이 될 수는 없다. 어떠한 과학 분야도 우리가 육체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 결국 빛은 꺼지고 우리는 암흑 속으로 다시 들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