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행위의 중요한 요인인 권태는 그 중요성에 비해 그리 관리 대상이 되지 못했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권태를 느끼게 된다. 권태는 꼭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날이 다른 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 생긴다면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권태에 빠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권태의 반대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다. 차라리 수렵시대에는 자극에 대한 욕망이 쉽사리 충족되었다. 동물을 추적하는 것도, 싸움도, 구애도 역시 자극적이었다. 백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권태감은 더욱 심해진다. 중세의 어느 마을에서 겨울을 맞는 사람들의 단조로움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읽고 쓰기도 할 줄 몰랐으며,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촛불밖에 없었고, 지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화롯불이 놓인 방안에는 화롯불에서 나온 연기가 가득 차 있다. 길은 거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었다. 당시 생활은 이루 말할수 없이 지루했으며, 마녀 사냥의 습관만이 겨울 저녁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을 것이다. 그러한 조상들에 비해 우리가 겪고 있는 권태의 정도는 덜하지만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깊다.
사회계층이 높을수록 자극의 추구는 점점 강렬해진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고, 가는 곳마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일을 하여 생활비를 벌여야 하는 사람들은 근무시간 중에는 권태로울 수가 없다. 일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권태롭지 않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다른 이상적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상주의자들의 생각에 비해서 그런 이상을 달성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깊어지게 마련이다. 권태의 어떤 요소는 인생의 필수적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또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인간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 욕구를 표현해 왔다. 전쟁, 학살, 박해 등은 모두 부분적으로는 권태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무 것도 안하느니보다 이웃들과 말다툼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절반 이상은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권태는 심각한 문제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권태가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권태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황폐하게 하는 것 두가지가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권태는 약물이 없는 곳에서 자라고, 삶을 황폐하게 하는 권태는 활기찬 행동이 없는 곳에서 자란다.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빠진 독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환희에 가까운 감격이야말로 즐거움의 필수요소라고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감격을 느끼기 위해서는 점점 더 강렬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권태의 어떤 요소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을 피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 이롭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훌륭한 책은 모두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재미
없는 시기가 있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현대의 부모들은 이런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영화 구경이나, 맛있는 음식같은 수동적인 오락거리를 너무 많이 제공하고 있다. 부모들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날마다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주로 자신이 노력과 창조력에 의지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영화구경처럼 재미는 있지만 육체적인 활동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 오락거리를 아이들에게 자주 제공해서는 안된다. 자극은 약물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양의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또 육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극만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린 식물은 같은 토양에 계속 놔둘 때 가장 잘 자라는 법인데,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잦은 여행을 하고, 지나치게 다양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아이에게 좋지 않다. 이런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지루함 자체가 유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참아내지 않고서는 좋은 성과를 거둘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가벼운 흥밋거리나 오락에 빠져 생활하고 있는 젊은이의 마음속에 건설적인 목적이 들어서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젊은이의 생각은 늘 멀리 있는 목적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에 쏠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대는 소인배들의 세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느린 변화의 섭리와는 지나치게 멀어진 세대, 모든 생명력이 마치 꽃병에 꽃힌 꽃처럼 서서히 시들어 가는 세대가 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대지의 생명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대지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대지의 생명의 흐름은 매우 더디다. 대지에게는 봄도 여름도 중요하지만 마찬가지로 가을도, 겨울도 중요하다. 활기찬 활동도 중요하지만 마찬가지로 평온한 휴식 역시 중요하다. 현대 도시인들이 느끼는 권태는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삶은 사막을 여행할 때처럼 뜨겁고, 답답하고 갈증에 시달린다. 행복한 인생이란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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