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폐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위원회의 조사결과는 충격적이다. 대충 추산해보아도 피해자 숫자가 25000-30000명에 이르는 이 대학살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공비들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막강한 후원을 등에 업은 토벌대였다. 월남한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보단 등 우익단체들은 살인과 고문, 강간, 방화 등으로 제주도를 공포의 섬으로 만들었고, 1948년 11월의 계엄령선포 이후에는 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으로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 대표적인 주민학살 사건인 ’북촌사건‘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마을주민 전체 400여명이 국군 2연대에 의해 총살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군인들에게 총살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실시되었다”라는 증언도 나왔다. 북촌사건은 훗날 마을을 습격한 무장공비들의 소행으로 책임이 전가된다.
국가가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해서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가 이미 괴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괴물화의 위험성이지, 지금 어떤 나라가 괴물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범죄는 절대 권력을 지닌 소수 독재자들의 야욕과 그들에게 복종하는 다수 봉사자들의 협력에 의해 현실화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이것이 인간인가’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평생 아우슈비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이 숫자가 너무 적어서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정말로 위험한 존재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관료들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광주학살에 참여한 공수부대원들을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작전에 참여했다면 ’나는 결코 양민을 학살하는 위치에 서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광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원들에게 흥분제를 먹였다든지, 술을 먹였다든지 하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도 이들의 상태가 비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량 학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결과들은 가해자들이 결코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모두가 다 별 문제없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일 때, 그 흐름을 벗어나는 것은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선생이나 성직자, 통치자 등 강력한 권위를 지닌 사람들에 저항하는 길로 가고자 할 때는 더욱 어렵다. 가공할만한 국가의 범죄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괴물들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사회 속에서 늘 칭찬받으며 윗사람 말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른들 또는 권위자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왜’라고 묻지 말고 그냥 ‘예’라고 말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이 사회에서 왕따 당하지 않고 원만하게 살아가는 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윗사람, 어른, 권력자, 권위를 가진 사람의 명령이나 가르침이 그들의 말이기 때문에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옳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짜 민주시민이 될 수 있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우리나라는 점진적인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감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증진되어온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구성원들 사이에는 과거와 같이 무자비한 군사독재정권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믿음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독재정권의 출현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믿고 완전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지금우리 시대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독재의 위험 앞에 벌거벗겨져 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정확한 시간과 함께 모두 어딘가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 대한 엄청난 기록이 쌓여 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주지 등록, 불변의 고유번호, 강제 발급되는 국가신분증 제도의 세 가지 성격을 모두 갖춘 강력한 주민등록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주민등록제도는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신용카드, 통장발급 등의 은행 업무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중요하지 않은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요구받는 필수조건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상에 자기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넣으면서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쌓인 우리의 정보는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악용될 수 있다.
과거에는 총과 칼, 고문에 의한 철권통치가 독재를 상징했다면 이제는 얼마든지 정보에 의한 독재가 가능해진 것이다. 꼭 협박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당신의 소비패턴과 생활리듬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핸드폰을 통한 위치추적과 디지털의 카메라의 보급은 모든 시민들을 감시의 대상이지 감시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만인의 민인에 대한 감시의 시대가 된 셈이다.
이전 시대와 21세기 정보 독재 시대의 차이가 있다면, 이런 통제사회의 도래를 내다보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놀랄 만큼 빠른 기술의 발전은 이제 누구도 멈출 수 없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통제의 증대도 그렇다. 기술문명이 가져다 준 효율성과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앞서 이야기한 비밀 또는 프라이버시 영역도 ‘비밀 없이 깨끗이 살면 되잖아? 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에게야 통제사회가 된들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어?’ 라는 한 마디 반박으로 언제든지 무시될 수 있다. 거기다가 새로 등장하는 테크놀로지 독재는 그 주체도 뚜렷하지 않다.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주도 인물이 없는 것이다. 주체 불분명성은 국가 권력의 괴물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이를 막고자 하는 사람들도 도대체 정확히 어디에서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이전에 상상도 못했던 독재권력이 출현할 수 있는 최적기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독재권력의 출현을 감지하고 이를 예방해야 할 의무를 지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바로 법률가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법률가 집단에게도 큰 기대를 걸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국가 권력 통제를 생각하기보다는, 국가권력을 누리는 쪽으로 자신의 역할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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