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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김정 지음)

한강의 기적과 세계 경제

한강의 기적과 세계 경제

1964년 한일협정 당시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1961년 총과 탱크를 앞세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다. 그는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경제를 부흥시켜 만화하려 했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대신 경제를 성장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공장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해서 돈이 없었다. 가난한 나라니까 다른 나라들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들고 나온 정책이 바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였다. 만일 일본과 국교를 수립한다면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일본에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반대했다. 왜냐하면 일본이 식민지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당장 돈이 급한 나머지 식민지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돈 몇 푼 받으려고 했다. 아예 국민들은 그깟 돈 몇 푼에 국민의 자존심을 팔아서는 안된다며 굴욕적인 협상에 반대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공짜로 3억 달러를 받았다. 이후에는 차관 형태로 돈을 빌려와서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미국도 한국에 들어가는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한국을 계속해서 반공기지로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공업화를 지원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세계경제에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경제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공황이 또다시 들이닥쳤던 것이다. 수출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는 세계경제가 침체기에 빠져들자 큰 타격을 받았다. 외국에서 돈을 빌린 기업들은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석유 값이 갑자기 뛰었다. 이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선택한 것이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화였다. 유신체제는 국민이 정부에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국민의 자유를 빼앗는 독재체제였다. 이 체제 아래서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은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한국을 반공기지로 만들려는 미국은 군사정권의 유신독재를 눈감아 주었다. 그리하여 한국경제는 1970년 세계경제의 위기 속에서도 중화학공업을 키우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낮은 임금에 우는 노동자와 싼 곡식 값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앉은 농민이 있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일반 국민은 좀처럼 그 기적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경제성장이었지만 그들은 대부분은 누릴 수 없었다. 공업화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당한 국민들은 끊임없이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대표적인 예가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투쟁이었다.

 

1973년 미국은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베트남 전쟁은 그때까지 미국이 패배한 단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베트남에는 베트남 국민의 뜻에 따라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패배는 냉전질서가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변명이 필요했다. 1969년에 나온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이 바로 그 변명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더 이상 아시아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친하게 지내자고 제안했다. 이것을 계기로 중국과 미국이 친해졌다. 사실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사이가 안 좋은 상태였는데, 이 틈새를 미국이 파고든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손을 잡으면서 냉전질서는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던 서유럽국가들과 일본이 성장하자 세계경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그 결과 미국과 소련을 편으로 하는 냉전질서는 뿌리째 흔들렸다. 이때 세계경제공황이 찾아왔다. 상품을 너무 많이 만드는 바람에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였다.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길거리는 가득 메우는 자본주의의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2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19805월 광주시민은 쿠데타에 반대하여 민주화시위를 벌였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 비극을 덮기 위해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전두환은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독재정치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이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대통령제를 직접선거제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전두환은 직선제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온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 와중에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숨을 거두었다. 들불 같이 일어난 민주화 요구에 전두환은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으로 얻은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민주진영의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민주 세력이 정치권력을 잡은 것은 그 후로도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민주화를 통해 한국이 달라지는 동안 세계의 모습도 확 달라지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해체되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보호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쫓으면서 한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1997년 말에 닥친 한국의 경제위기도 예전처럼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남북 대치상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래도 6월 민주항쟁을 이룩한 국민들은 이처럼 험난한 환경을 일부 독재정권의 손에 맡겨두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