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미군과 중국군
6.25전쟁은 1950년 새벽에 시작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남쪽으로 탱크로 밀고 내려오면서 전면전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난 것일까? 분단된 나라를 북한 중심으로 통일하여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대전으로 도망갔다. 이승만은 자기는 도망가면서 서울 시민에게는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나타나자 그제서야 서울 시민은 피난길에 올라 한강을 건너려 했다. 이때 국군이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이 참전을 결정했고, 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을 북한과 중국의 국경까지 밀어붙이자, 이번에는 중국군이 전쟁에 참여했다. 다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국군은 평양까지 철수하면서 대동강 다리를 폭파했다. 결국 전쟁은 3년간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휴전협정으로 끝이 난다. 그리하여 분단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과 거의 같은 지점에 휴전선이 그어졌다.
6.25전쟁 때문에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죽거나 다친 사람이 500만명이었다. 당시 인구가 3000만명이었으니 여섯명 중 한 명이 죽거나 다친 셈이다. 그리고 공장, 건물, 토지 등 거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고 황폐화 되었다. 전쟁 이후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민이 되고 말았다. 6.25전쟁을 겪고 난 후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증오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국은 세계5대 강국중 하나가 되었다. 국제연합을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와 함께 이끌게 되었다. 중국 대표는 장제스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부정부패가 심해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들어갔다. 중국이 공산화 되자 냉전은 절정에 달했다. 중국의 공산화와 6.25전쟁은 우리 이웃나라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와 달리 미국 한 나라가 점령했다. 미군은 처음에는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군국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군대를 유지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냉전이 계속되면서 중국의 공산화에 미국은 일본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반공기지로 만들기로 계획을 바꿨다. 미국은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만들었고, 1954년 일본은 자위대라는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일본이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다. 6.25전쟁으로 동아시아지역의 긴장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팽팽해졌다. 한반도는 세계사회주의 체제와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서로의 경쟁을 위해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미국은 6.25전쟁 이전에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했다가 전쟁이 벌어지자 유엔군을 이끌고 들어왔다. 그때 들어온 미군은 지금까지도 한반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를 고뇌에 빠뜨리는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반공기지가 된 남한과 제 3세계의 성장
6.25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우리나라에 공짜로 농산물을 원조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한국에게 미국은 농산물을 포함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한국에게 준 농산물은 자기나라에서 먹고 남은 농산물이었다. 도움을 받은 한국 입장에서는 명심해야 할 것이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이 필요 없어지거나 한국을 도울 여유가 없어지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던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1958년에 전해에 비해 원조가 3분의1 정도가 줄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 실업자가 되었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쳤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력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48년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1952년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헌법에는 한 사람이 두 번만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헌법을 고쳐 1956년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원조가 줄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민들이 싫어하는데도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1960년에는 투표함을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를 했고 국민은 이승만에게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까지 거리로 나놔서 시위를 했다. 이승만이 쫓겨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이승만 정부 때 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가 생겨났다. 학생들이 이제 북한학생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을 밖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1961년에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통일운동을 벌였다. 북한학생들과 만나려는 즈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소장이었던 박정희는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핑계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반공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모든 통일운동을 막았다. 한국은 반공의 첨단을 달리는 국가가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냉전에 앞장서고 있던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이라는 곳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모두 29개국이 참가했는데 모두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체제에 반대하는 국가들이었다. 이 국가들을 ‘제3의 세계’국가라고 불렀다.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제3세계지도자들은 6.25전쟁을 보고 큰 두려움을 느꼈다. 미국과 소련 대결에서 시작된 냉전이 결국 한국애서 전쟁이라는 형태로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런 전쟁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이 하나로 뭉치자고 주장했다. 195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에서도 6.25전쟁을 계기로 평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반둥회의에서 처음 세력을 과시한 비동맹세력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3세계의 단결을 외쳤다. 이제 더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 끌려 다닐 수 없다는 국가들의 함성이었다. 이와 같이 세계의 냉전질서는 6.25전쟁을 겪고 나서 변화의 조짐을 보였지만, 정작 전쟁터였던 한반도에서는 냉전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한국은 미국의 편이 되어 미국의 원조를 받았다. 그 대가로 한국은 미국의 군사기지가 되어 북한과의 군사적 대결을 강화했다.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의 팽창을 막으려는 미국의 뜻에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승만은 냉전을 이용하여 자신이 이익을 챙기기 바빴다. 그런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자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자신의 힘을 키우지 않고 외세에 의존한 결과는 이렇게 비참했다. 한국은 4.19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루고, 밖으로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민중의 열망을 짓밟아 버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질서 속에 한층 더 깊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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