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주권자란 예외 상황을 결정하는 자’라고 했다. 예외 상황은 법 이전의 질서, 법에 앞서서 질서를 부여하는 권력공간을 등장시킨다. 예외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는 神的 주권자는 모두 긍정적인 권력규범보다 앞서는 절대적 권력을 갖는다. 그 누구도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자신을 법규범보다 상위에 정립한 주권자가 법규범의 타당성을 심판한다. 그 결정은 모든 규범적 구속성에서 벗어나며 본래적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신적 주권자와 달리 정치적 주권자의 권력은 상대적이다.
절대적 제후조차 정보와 여론에 의존하며 조언자들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 이로 인해 모든 직접적 권력은 간접적 영향력에 복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 권력자를 중심으로 권력의 전실專室이 생겨난다. 장관, 고해신부, 비서, 주치의, 심복, 첩 등이 채우고 있는 이 전실은 모함과 거짓말을 통해 본래적인 권력공간을 도려내고 흔든다. 권력자를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켜 권력자가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자에게만 접근할 수 있고, 그의 권력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며 그 사람들 역시 권력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권력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상적인 경우 권력기구는 간접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행사하지 못한다. 이전 시대의 권력 전실은 오늘날에는 그와 다른 모습을 띤 권력의 전실들로 대체되었다. ‘로비’라고 불리는 권력의 응접실이 그것이다.
‘기술을 부린다’에서 기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외부까지 확장시키려는 권력수단이다. 기술은 타자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연속시키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전실은 권력의 부속공간이다. 어떤 권력공간도 절대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권력이 자기 소외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결핍된 폐쇄성으로 인해 인간의 권력공간은 늘 부속 공간, 전실 혹은 주변공간에 노출되어 있다.
오늘날 미디어들은 정보장벽을 쉽게 극복한다. 그래서 권력공간을 공공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는 권력 전실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미디어에 내재하는 특성인 구조적 분산과 탈집중화는 한 곳으로의 확실한 귀속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디어 공간에는 나무나 많은 행위자와 다양한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미디어는 스스로를 권력공간으로 조직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디어와 권력 과정 사이에는 다양한 상호관계가 가능하다. 미디어가 권력의 전략적 행위에 대해 전유專有될 수도 있고, 지배적인 권력 질서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전체주의적 권력은 미디어 공간을 점유하려 하고, 나아가 공공여론의 형성은 미디어 발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혁명은 권력의 부분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매개하는 전체성의 중력을 형성해야한다. 혁명 상황에서는 폭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에만 의존하고 어떤 권력에도 의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권력을 가진 폭력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폭력은 공간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공간을 창출해낼 수는 없다. 헤겔도 이렇게 쓴다. ‘... 국가가 폭력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고 해서 국가가 폭력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 인륜, 법이다.’
권력은 서로 관계를 맺고 합의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능력에서 나온다. 권력의 근본 현상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자의 의지를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통의 의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는 곳에 권력이 있으며, 정치적인 것은 이러한 권력을 산출해내는 행위에 근거한다. 가장 위대한 인간의 권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합의를 통해 자연적 개인이나 국가의 구성원들의 통일된 권력이다. 명령하는 주체와 복종하는 주체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는 당연히 권력관계이지만, 이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에 근거하지 않는다. 권력은 타자 속에서 자신을 연속시키는 능력이다. 그 권력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자아의 연속체를 만들어낸다. 국가 같은 정치적 권력체 또는 포괄적인 질서를 산출해내는 연속체도 그렇다. 투쟁을 통해 생겨난 권력관계에서 승자는 패자에게 자신을 연속시킨다.
구조적 폭력은 폭력으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념들을 형성하고 확산시킴으로써 정당화에 기여하는 소통을 암암리에 봉쇄한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썼다. ‘규범들이 일반화 될 수 있는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한, 그것은 이성적 동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일반화 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갖지 못하는 규범들은 폭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규범적 근거’라고 부른다. 권력은 결코 순수하게 소통적이거나 순수하게 상호이해 지향적일 수 없다. 폭력은 소통 참여자들에게서 자유의 감정을 앗아간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들이 권력자의 지배를 완전히 승인하는 권력관계는 폭력관계는 아닌 것이다. 폭력과는 달리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정치란 어느 한쪽에서 물질화된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 이상의 것이다.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은 동의가 아니라 권력 균형으로서의 타협이다. 타협한다는 것은 한 사태의 결정을 심판의 선언에 맡긴다는 것이다. 정당 정치에서 심판은 당연히 국민이다.
틸리히도 권력이 공간에 의존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은 한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존재 능력이다. 그 때문에 모든 사회집단이 공간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것이다.’ 공간화란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모으고 결집시키는 자기중심적으로 조직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권력은 장소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는 생겨날 수가 없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탈영토화의 움직임이 눈에 띈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화는 다양한 재공간화再空間化의 형태들 또한 만들어 내고 있다. 영토적 공간에서건 디지털 공간에서건 권력의 발생은 공간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시장 역시 경제적 영토점유를 통해 점거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합병이나 인수는 본질적으로 영토점유와 구별되지 않는다. 권력은 중앙 집중적이다. 권력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하나로 모이게 한다. 권력은 자기중심적이다. 애초에 존재하던 타자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비로소 권력 관계가 생겨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전제한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오히려 자유는 권력관계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중요한 요소이다. 주체들이 자유로워야만 권력관계가 존속한다. 온통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만 채워진 곳에서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불안이 권력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킨다. 자신을 확고하게 안정시키려는 권력은 열린 공간이나 예측 불가능한 공간을 제거한다. 독재적 권력이란 실제로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폭력에는 매개능력이 없다. 푸코가 권력이란 ‘타인의 태도를 결정하려고 하는 시도’라고 정의하는 한, 권력은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이고자하는 것 또한 타인 안에서 자신으로 회귀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유기체의 근본 기능인 착취는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 그것은 삶의 의지 그 자체인 권력 의지의 결과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성장하고 주변을 장악하고 자라나며 스스로를 늘리려 한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타자와 약자를 지배하고 상처 입히고, 위압하고 억누르고 그들에게 자기 형태를 강요해 자기 것으로 만들려한다. 가장 부드럽게 말해도 착취이다. 그것은 어떤 도덕이나 비도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권력의지 때문이다. 권력은 생명의 일반원리이다. 진리 또한 권력의 발생으로 해석된다. 진리는 권력자가 타자를 자신에게 흡수하고 타자에게서 자신을 연속시키는 것이다. 진리는 지배를 위한 매개체이다. 점령, 착취 또는 상처 입히기는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 이들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반영한다.
친절한 자는 타자가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모습대로 그를 대해주는 사람이다. 전략으로서의 친절함이란 A가 파트너인 B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B 또한 A에게 그런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이다. 친절한 자는 자기 자신의 기대나 견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소통적 교환의 장에 내놓을 적절한 순간을 엿보고 있다. 환대의 풍습이 갖는 의미는 타인의 마음 안에 깃들어 있는 적의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더 이상 적으로 느끼지 않을 때 환대는 줄어든다. 니체에게 관대함은 넘쳐흐르는 권력이 산출해낸 충동이다. 관대함과 결부될 경우 부유함도 권력이다. 그건 부유함이 누군가에게 기쁨이나 물질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대함이 없다면 그렇지 못하다. 그럴 경우 부유함은 사람들을 보호해 주지 않으며 사람들을 질투의 표적으로 만든다. 아무도 아닌 자는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권력이란 누군가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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