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는 강제를 통해서만 개별자에게 자신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에 반해 높은 수준의 공동의 가치, 매개가 존재할 때는 강제가 없어도 지속성이 형성된다. 개별자 스스로가 전체를 자기 스스로의 규정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법치국가에서 법질서는 개별 시민들에게 낯선 강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내린 규정으로 여겨지며, 그것이 시민을 비로소 자유로운 시민으로 만든다. 반대로 전체주의 국가에서 전체는 개별자들에게 낯선 규정으로 경험된다. 서로 대립적인 권력 공간들이 하나의 전체성으로 통일되거나 매개되려면 포괄적인 권력 영역과 높은 수준의 매개가 필수적이다. 오늘날 세계화가 갖는 문제는 세계 전체를 매개할 정도로 충분히 지구적이지 못하므로, 심각하게 서로 다른 욕구와 가치들이 혼재한다. 그 어떤 포괄적인 권력과 매개에 의해서도 서로 묶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관계이다. 타자가 없다면 아무런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를 살해하는 것은 이 권력 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 권력도 생겨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물리적 강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상대의 물리적 강함을 예견해서 스스로 상대에게 복속할 때 권력이 생겨난다.
한번 붙잡힌 쥐는 고양이의 폭력 아래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으면 결국 죽일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면 다른 요소가 나타난다. 고양이는 쥐를 얼마쯤 도망치게 내버려두기도 하고 쥐에게서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고양이에게 잡힐 수도 있는 쥐는 여전히 고양이의 권력 테두리 안에 있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다시 말하면 공간, 희망, 빈틈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가 그 권력의 실체이다.
A와 B와 C가 우연하게 옆에 있게 되었을 경우 이 인접관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우연성은 다시 말해, 우연하게 옆에 있게 된 것이 특정한 형상을 통해 구조화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겨난다. A, B, C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관계 맺을 때, 그것들이 어떤 구조나 맥락 속에 서로를 관련시키는 관계연속체에 편입될 때 하나의 의미가 생겨난다. 의미란 관계 또는 관계 맺기 현상이다. 어떤 이해나 행위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기 위해 권력은 일정한 의미에 기대거나 스스로 의미 지평을 만들어야 한다.
니체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힘, 권력을 타자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자는 상처내기와 고통스런 씨름을 통해 자신을 이해시킨다.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용하고 낯선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지배하려는 것이며 상처 입히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지배에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수용하는 것이며 복종한다는 것이다. 명명命名하는 것은 동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력자는 사물의 의미와 그 지평地平을 다시 말해 ‘어디로? 그리고 무엇을 위해’를 규정한다. 권력 의지의 결핍은 의미의 공허로 이어진다. 권력이야말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력은 사물들을 명명하고 그것의 ‘어디로’ 와 ‘무엇을 위해’를 규정함으로써 지평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모든 목표와 목적은 어떤 의지의 표현방식이며 그 의지란 다름 아닌 권력 의지이다. 의미의 발생은 권력의 발생이다. 성장하려고 하는 어떤 것은 성장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에 따라 자신의 권력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의미에 따라 해석한다. 해석의 근저에는 무엇인가에 대해 주도하려는 의도가 놓여있는 것이다. 권력은 늘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관점을 산출해낸다. 공간을 창조하는 건축가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자기 자신이 머문다. 공간을 기획하면서 건축가는 자기 자신을 기획한다. 권력은 자기 자신이 공간적이 되도록 공간적으로 성장하도록 한다.
푸코에게 권력은 본질상 억압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연과 본능을 억압하고 어떤 집단을 억압하며 개인을 억압한다. 억압이란 어떤 특정한- 매개가 부족하거나 없는- 권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起因하지 않는다. 권력을 억압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권력은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생산적 네트워크로 파악되어야 한다. 권력은 낯선 자들을 유혹해 자신에게 오게 하는 사이렌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세 가지 테크놀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 주권자적 권력이다. 이 권력은 자신을 과시하고 복수, 투쟁, 승리라는 형태를 띤다. 범죄자는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적이다. 주권자적 권력의 언어가 피의 상징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권력은 매개수준이 낮다. 두 번째 시민적 법률의 권력은 자신의 고유한 기호체계를 사용한다. 노예를 강철로 묶어두는 자는 아둔한 전제자專制者일 뿐이다. 참된 정치가는 자신의 생각 사슬로 노예를 확실하게 묶어둔다. 그 사슬의 다른 쪽 끝은 이성의 질서에 묶여 있다. 이 권력은 안정적이다. 왜냐하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다시 말해 외적인 강제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권력은 자유와 복종이 함께 일어나게 한다. 세 번째 규율 권력은 상처나 표상보다 더 깊숙이 주체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이 권력은 신체 내부로 들어가 거기에 흔적을 남기며 그를 통해 습관으로 만들어 낸다.
푸코는 감옥의 출현을 규율 권력과 관련시키는데, 여기에서는 순종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추구되었다. 철저한 시간계획. 습관의 전유專有, 신체의 속박을 통해 특정한 태도를 훈련시킴으로써 교정이 시도되는 것이다. ‘이렇게 습관화가 자리 잡게 되면 권력은 더 이상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라고 푸코는 말한다. 그래서 이 권력은 일상적 모습을 띠고 있다. 규율 권력은 신체를 형성하고 구조화하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어떤 규율, 행위가 신체적으로 특정한 태도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조금씩 이러한 태도에 익숙해진다. 규율 권력에는 강제성이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생산적인 작용 또한 생겨난다. 규율 권력은 신체를 어떤 의미 속에 가둠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규율 권력이 신체에 남기는 흔적들은 늘 무엇인가를 의미하며 그 흔적들이 정신을 이루는 것이다. 규율 권력은 또한 의미 구성체들로 이루어진 관습의 연결망으로 짜여 있다. 어느 강의에서 푸코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권력은 가장 간계奸計스럽고도 일상적인 규범이라는 형태를 띠게 됨으로써, 권력으로서의 모습을 숨기고 사회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아비투스(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본성)는 한 사회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데 기여하는 가치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양 체험되는 것이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권력은 기호嗜好와 의미 형성을 활용하여 특정 집단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치체계나 세계관을 확립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들은 그것이 마치 자연적 질서인양 따른다. 동질적이고 민족국가인 의미 형성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중의 충성과 그것을 통한 지배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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