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느낀다는 것(채운 글 ,정지혜 그림)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한번 태어나고 죽지만 인문학적으로 여러번 태어나고 죽는다. 우리의 지식과 믿음, 감각이 완전히 변할 수 있다. 이제까지 좋아했던 일이 시시해 질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갑자기 중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인간은 말로써, 개념으로써 자기 삶을 만들고 세계를 짓는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가진 개념들이 우리 삶이고 우리 세계이다. 따라서 삶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일은 우리 말과 개념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하고 나타난다. 우리의 깨우침과 우리의 배움이 거기서 시작하고 나타난다. 아이들이 말을 배움으로써 삶을 배우고 세상을 배운다. 말을 만들어가며 삶을 만들어 가고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 간다. 우리는 자기 삶에서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 탐구한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 느낀다는 것, 믿는 다는 것, 꿈꾼다는 것, 읽는다는 것... 이 모든 말들의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한다.

 

숲을 걷는 상상을 해보자. 동이 터 오기 시작한다. 나무 사이로 뿌연 빛이 내리고 새와 벌레들이 소곤 된다. 나는 숲길을 홀로 걷고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부작사부작 흙 밟는 소리가 들린다. 공기는 좀 싸늘하다. 숲에서 품어내는 청정한 음이온 때문인지 몸은 날아갈 듯 가볍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데 내 온 몸이 촉수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숲속이 아침을 느낀다. 농부가 혼자 무거운 쟁기를 끌면서 땅을 갈고 있는 그림을 본다. 농부를 10초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오지 않은가? 에드가 드가의 푸른 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이라는 그림을 보면, 어린 무희들은 중력의 무거움을 가르고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처럼 가벼워 보인다.

 

영국 작곡가 엘가의 작품 중에 위풍당당 행진곡이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을 들으면 축 늘어진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반면에 차이콥스키의 비창은 우리 마음을 격정적으로 소용돌이치게 한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듣고 맛보고 만지는 것들, 그러니까 우리 몸이 받아들이는 모든 경험은 어떤 느낌을 불러 온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일을 당했을 때도 마찬기지다. 흔히 느낌이 좋다, 나쁘다라든지 느낌이 온다는 말을 한다. 특별한 말이나 행위를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사람들에게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독특한 체취와 분위기를 느낀다. 물론 우리도 그들에게 어떤 느낌을 남길 것이다. 그중 어떤 느낌은 오래 남고 어떤 느낌은 금세 사라진다. 만약 우리가 느끼는 능력이 없다면, 느낌의 순간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다행이 우리가 사는 날은 매일 다르고 우리도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변하고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어떤 느낌의 순간들이 닥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좋은 느낌일수도 나쁜 느낌일 수도 있고, 익숙한 느낌일 수도 낯선 느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무언가를 느끼면서 세계를 경험하고 배워나간다.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그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뭔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느낌이 오는 경우가 있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무언가를 보고 듣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난다. 때로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지기도 하고 온몸이 감전된 것 같이 찌르르하기도 하다. 이것이 다 느낌이다.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느낌을 뜻하는 한자는 이다. 감이란 사람 마음이 자극 앞에서 움직인다는 뜻이다. 느낀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른 세계와 통하는 것이다. 돌도 나무도 바람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은 다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때문에 두 물질이 두 사람이 두 세계가 만나면, 스파크가 일어난다. 느낀다는 것은 두 개의 파장이 만나는 것이다. 이쪽과 저쪽사이에 전류가 흐르고 그 결과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사건이다. 짜릿하다, 찡하다, 산뜻하다, 섬뜩하다, 상쾌하다 등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를 떠올려보라.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처럼 판단을 나타내는 말들과 달리 느낌을 나타내는 말들은 우리 몸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느낌은 몸과 마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매일 똑같은 해가 뜨고 지는 것 같지만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이 다르듯, 내 몸과 마음은 매일 다른 하루를 살고 다른 공기를 호흡하고 어제와 다른 사건을 경험한다. 가슴 뛰게 하는 것들이 시들해 지기도 하고 아무 느낌 없던 것들이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처럼 느낌은 반복되지 않는다. 같은 것에 대한 느낌이라도 매번 다른 빛깔이고 그 정도가 다르다. 왜 그럴까?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늘 그대로인 것 같지만 공기 중 기류는 끊임없이 바뀐다. 찬 공기는 아래로 더운 공기는 위로 바깥공기는 안으로 안 공기는 바깥으로. 숲속의 나무도 새로 잎이 나는가 싶더니 금세 무성해지고 그리고 또 잎이 지고,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느낌은 두 전류의 부딪침과 교류다. 내가 변한다는 것은 내가 내뿜는 전류의 파장과 세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신이 전류()를 발산하면서 조금씩 다르게 변해간다. 두 전류가 만났을 때 발생하는 느낌도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의 유명한 대목이 있다. 마들렌이라는 과자가 불러일으킨 느낌을 묘사한 장면이다. 과자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뿐인데 주인공 마르셀은 어린 시절의 마을과 집, 거리,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한다. 이처럼 느낌은 우리 몸이 감각하는 것들로부터 발생한다. 그래서 유사한 감각을 만나면 유사한 느낌이 떠오르고, 어떤 느낌은 특정한 감각과 연결되기도 한다. 우리 기억력은 보잘 것 없지만 의외로 우리 몸은 어떤 경험은 아주 잘 기억해 낸다. 자전거를 배울 때 몇 번을 넘어지고 나서야 겨우 혼자 중심을 잡게 된다. 조금씩 자전가에 익숙해지고 마침내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전거 타는 법을 한번 배우고 나면 한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몸이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내 발이 집으로 향하듯 몸은 스스로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한다.

 

어떤 음식이나 상황에 대해 안 좋은 경험을 한 경우에는 몸이 저절로 거부하거나 피하기도 한다. 이처럼 감각은 우리 맘에 새겨진다. 머리로는 어떤 느낌을 재생해 내기 힘들지만, 몸은 단번에 그 느낌을 기억해내고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우리 자신은 살아가면서 만나고 겪는 모든 사건과 느낌이 새겨진 거대한 화석이다. 여러분의 몸에는 어떤 느낌이 새겨져 있는가? 그 느낌들이 여러분을 어떤 시공간으로 데려다 준다.

 

느낀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다르다.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느끼기 위해서는 만남이라는 사건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 우리 앞에 사과가 있다. 사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떠올려보면 사과는 빨갛고 탐스럽고 새콤달콤하다. 사과 성분, 사과 산지, 사과나무 키우는 법 등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정도가 사과에 대해 아는 것이다. 사과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사과를 느낄 수는 없다. 같은 사과에 대해서도 농부가 사과를 대하는 태도와 과학자가 대하는 태도, 요리사가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농부는 사과 한 알에서 한 해의 농사를 떠올릴 것이다. 농부의 눈은 사과 한 알에서 햇빛과 바람과 노동을 떠올릴 것이다. 요리사는 사과 맛이 어떻고 식감이 어떻고, 어떤 요리에 응용하면 좋을지를 중심으로 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과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경험, 직업, 나이, 성별에 따라 모두 다른 방식으로 본다. 우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사물을 본다. 이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사물을 다른 식으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이런 경험은 여러분도 있을 것이다. 안 좋은 소문을 들으면 그 사람의 행동이 안 좋게 보이고, 좋은 얘기를 들으면 나쁜 행동을 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며 넘어가게 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앎 이전의 문제 혹은 앎 밖에 있는 문제다. 아는 것과는 무관하게 무언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아는 것만 꽉 움켜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느낀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틀릴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때 발휘되는 능력이다. 아는 걸 내려놓고 보고 듣고 만질 때 같은 것도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종종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이 있는 자리를 고집하지만, 온 몸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은 경험을 통해 생각을 수정하고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 성장한다. 더 잘 느끼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 이처럼 몸으로 부딪혀 얻은 감각으로부터 우리 안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대부분의 경우 옳고 그른 건 단번에 판단하기 어렵지만, 좋고 싫은 것은 금방 느낄 수 있다. 마치 음식을 한 입 먹었을 때 맛이 있고 없고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지식은 우리를 속일 수 있지만 느낌은 그럴 수 없다. 나를 말해주는 것은 학벌이나 재산, 직업이 아니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감동을 주는 것들, 아프게 하는 것들, 기분 좋게 하는 것들, 화나게 하는 것들 등이다. 하지만 하나의 지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되듯이 즉각적이고 습관적인 느낌들을 너무 믿어도 안 된다. 몸과 마음은 솔직하기도 하지만 잘 안 변하려는 속성도 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나 생각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이다. 담배를 계속 피우면 폐병이 생기고, 같은 스트레스에 계속 시달리면 암에 걸리고, 불규칙한 식습관을 반복하면 위장에 탈이 난다.

 

'느낀다는 것(채운 글 ,정지혜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끼는 것도 능력  (7) 2024.03.08
느낀다는 것 2  (0) 2024.03.05
느낀다는 것1  (1) 2024.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