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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다는 것(채운 글 ,정지혜 그림)

느낀다는 것 2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작품이 유명하다. 나우시카는 바람을 타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만물과 교감하는 느낌의 달인이다. 동물 전염병이 발생하는 데에는 인간도 책임이 크다. 인간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사료에 처리된 방부제 때문에 감염이 대규모로 무서운 속도로 일어난 것이다. 나우시카가 오늘날 이렇게 생매장당하는 동물들을 봤다면 통곡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들의 죽음이 언젠가는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우시카는 만물을 자기 몸처럼 느낀다. 그들이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들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느낀다. 함께 살고(공생) 함께 느끼고(공감) 함께 나누는(공유) 삶을 사는 것이다. 동물들과 교감한다는 어떤 치료사의 치료법이란 그저 동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것뿐이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네가 아프니까 내 마음도 아프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계속해서 동물들의 마음에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고 치료사가 한참 보고 있으면 동물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보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소리들을 듣는다. 관세음보살은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잘 살피고 어루만져주는 보살이다. 보살이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하듯 의사는 사람들의 병을 치료한다. 왜 의사가 되려고 할까? 돈을 잘 버니까? 사회에서 알아주는 직업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의사야말로 환자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느끼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편작이라는 명의가 있었다. 편작에게는 두 형이 있었는데 모두 의사였다고 한다. 편작이 이름이 난 것을 보면 아마 형들은 형편없던 의사라서 유명하지 않은 것일까? 실은 편작은 제일 실력 없는 의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위나라 문왕이 편작에게 삼형제의 우열을 묻자 편작이 이렇게 답했다. “맏형이 가장 좋고 작은 형이 그 다음이며 내가 최하위이다. 맏형은 병이 나면 을 보는데 아직 형체를 이루기 전에 이것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명성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작은형은 병을 고치는 것이 털끝에 있다. 그러므로 명성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은 혈맥을 찌르고 독약을 투여하며 기부를 고치는 치료를 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제후에게까지 명성이 난다.”

 

한마디로 진짜 명의는 척보면 안다는 것이다. 병이 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인상, 걸음걸이, 냄새 등을 통해 바로 병의 기운을 직감하는 것이 최고의 명의이고, 찌르고 투약하고 째는 의사는 급이 제일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최고명의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의 방향이라든가 대기의 흐름 등을 통해 날씨를 예측하듯이 어떤 사람의 몇 가지 특성만 가지고도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병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병을 고쳐야 용하다고 소문이 날텐데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병을 고치니 사람들이 알아줄 턱이 있는가? 예술가는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보고 느끼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른 걸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을 사로잡는 아주 낯선 기운을 느끼고 이 낯선 느낌들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보살은 들리지 않는 중생의 소리들을 보고 명의는 병이 드러나기도 전에 병적인 기운을 포착하고 예술가는 정지된 사물에서 막 생성되고 있는 어떤 힘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이다. 어떤 것과 통하면 그것이 내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고 마음의 풍경을 보게 된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미세한 징후들을 포착할 수도 있다. 안색이나 눈빛, 목소리, 손동작, 찡그림 등 어느 하나도 그냥 놓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치유는 타인을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고쳐주는 사람이 의사라면 의사야말로 가장 잘 느끼는 자, 느낌의 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타인과 함께 느끼는 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사가 아닐까?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선 아니면 악, 큰 것 아니면 작은 것, 옳은 것 아니면 그른 것 등으로.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무 짜르 듯 뚝딱 판단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는 대로 보려 하는 습성이 있다. 이렇게 저렇게 시선을 바꿔보거나 마음을 달리해서 보면 전혀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데도, 오직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고집을 꺾고 나면 세상은 모호한 것 투성이다.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게 불행이 되기도 하고 틀리다고 생각했던 게 맞기도 하고, 오르막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려가고 있는 경우도 있고 동물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는가 하며, 인간이 너무나 동물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느낌의 달인에게 공통된 특징이 있다. 두 세계의 경계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선명한 가치판단으로 세상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느끼기가 어렵다.

 

느낌은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의 세계가 흔들리고, 분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의심스러워질 때 생겨나는 법이다. 그 순간 두 세계의 구분이 흐려지면서 세계가 변모한다. 예술은 바로 이런 느낌과 연관되어있다. 경계 위에서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느껴질 때,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하나의 판단을 방해할 때, 그때 우리는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된다. 예컨대 차가운 뜨거움이라든지 슬픔, 기쁨이라든지 텅 빈 충만함 같은 모순된 느낌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예술은 결국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느끼는 연습을 통해 예술가는 자신의 독창적 세계를 형성한다.

 

다르게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스스로를 전과 다르게 변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변신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에서 보는 것이다. 카프카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 피터는 인간에게 잡혀 상자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 피터는 이 상자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어떻게든 상자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피터는 결심한다. ‘그래, 나를 벗어나 보자이렇게 생각한 원숭이 피터는 인간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인간의 말을 인간의 행동을 배운 피터는 자기 힘으로 먹을 것을 얻고, 자기의 실력으로 인간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있는 자리를 떠나고 싶으면 변신하라고, 변신하고 싶으면 배우라고. .. 다시 배워야 한다면 배우게 된다. 앞뒤 가리 않고 배우게 된다 우리는 그저 떼를 쓰면 되는 줄 안다. 자유를 달라고 더 좋은 것을 달라고 떼쓰는 대신 스스로 변신하는 길을 택한다. 막힌 줄만 알았던 사방에 사실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는 것이다. 변신의 출발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자신을 다르게 느끼고 세상을 다르게 느끼고자 의지하는 것이다.

 

“.. 짓는 자가 감히 어찌 짓겠는가? 짓는 자로 하여금 짓게 하는 자가 지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짓게 하는 자가 누구인가? 천지만물이 바로 그것이다. 천지만물은 천지만물의 이고 천지만물의 이 있고, 천지만물의 이 있고 천지만물의 이 있다. 총괄하여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고,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은 각각의 천지만물이다. ..”(이옥, ‘이언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일은 어느 순간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되어 줄줄줄 내 입으로 내 손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고집하면 안된다. 자신을 늘 비워두어야 한다. 배가 부르면 뭘 먹어도 그 음식을 충분히 느껴질리 없다. 우리가 뭔가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한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타인의 힘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생명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물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나와 무관해 보이는 지구상의 많은 존재들이 나와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는 순수한 도 순수한 도 없다. 악이라고 생각했던 게 나에게 선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선이라고 생각했던 게 어느 순간 악이 되기도 한다. 시련이나 병이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 선물이 되는 것처럼. 어떤 경험은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그 경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워두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습관, 자신의 의견, 자신의 시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의 경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잘 느끼는 자들은 비움의 달인이다.

 

느낀다는 건 언제나 둘에서 시작한다. 이것과 저것이 만나 폭발적 에너지를 만든다. 느끼는 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다른 무엇을 만나 둘을 이루고, 열을 이루고 무한을 이루는 문제다. 세상에 없어도 되는 건 없다. 없어도 되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끔찍한 바퀴벌레도 모기도 모두 존재할 이유가 있으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폭의 그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하나가 달라지면 전체가 달라지고 마는 그런 그림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 화가는 자신이 본 것을 나누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자신이 들은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느끼기 위해 악보를 그린다. 또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자신의 느낌을 아무와도 나누지 않으면 그 느낌은 이내 사라지고 말지만, 사람들과 나누면 그들을 통해 느낌이 배가 되고 전달되면서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느낌은 붙잡을 수 없고 축적할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고 오로지 나누고 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잘 느낄 수 있다. 혼자 느끼더라도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내 느낌이 힘을 갖는 언어가 된다. 느끼는 데는 여려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술이란 게 어려운 지식이나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비우고 의심하고 변신하고 경계를 넘나들고 전달하고 벗을 사귀는 기술, 그런 게 느낌 달인의 능력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친구에게 선물을 할 때 거기에는 내 마음이 들어가 있다. 선물뿐 아니라 돌고 도는 돈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고, 나고 죽는 동물들에게도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다 우주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풍경이라도 유화나 수채화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같은 노래라도 어떤 악기를 사용해서 편곡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마치 달고 쓰고 맵고 신 음식을 먹을 때 즉각적으로 얼굴 표정에 나타나듯이 우리 몸은 어떤 물질과 만날 때 순식간에 반응을 한다. 차다, 따뜻하다, 가볍다, 무겁다 등등을 느끼면서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펴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어떤 물질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느낌을 번개처럼 낚아챈다. 그래서 딱 보며 안다. 나무속에 돌 속에 흙 속에 어떤 형태가 숨어있는지를. 그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예술의 재료가 된다. 예술가에 필요한 건 새로운 재료가 아니라 많이 느끼고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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