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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다는 것(채운 글 ,정지혜 그림)

느끼는 것도 능력

 

 

장자라는 책을 펼치면 맨 앞부분에 붕새와 참새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바다에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 물고기가 어느 날 바다에서 솟아나와 붕이라는 새로 변한다. 이 새는 얼마나 큰지 날개 짓을 한 번 할 때마다 수만 리를 난다고 한다. 그렇게 큰 새가 여섯 달을 날아오르고서야 비로소 한 번 쉰다고 한다. 그런데 저 아래 있는 참새가 그런 붕새를 보며 말한다. ‘아니 저 새는 왜 굳이 저렇게 높이까지 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냥 내가 있는 높이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도 말이야하면서. 붕새처럼 지금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세계를 떠날 수 없고, 자기 세계를 떠날 수 없다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없으면 다르게 느낄 수도 없다. 참새처럼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붕새의 노력을 비웃거나 처음부터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체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늘 따분하고 지겹고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느끼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느낌의 순간은 절로 오지 않는다.

 

느낌의 능력이란 익숙한 것으로부터 낯선 차이를 포착해 내는 능력이다.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낀다. 세상 모든 것의 다름을 느끼고 그 다름에 이름 붙이고, 그 다름의 가치를 발견하는 자가 예술가들이다. 자신만 보지 말고 휴대폰만 들여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라. 세상은 각기 다른 것들로 반짝거리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사진을 찍고 싶은 그 순간, 세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 순간을 위해 기다리는 인내심이 우리에게 없다. 디지털 카메라의 편리함과 기다림, 인내와 맞바꾼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온 몸이 세포를 열어놓고 열심히 기다리는 자에게만 무언가가 와서 꽂히는 것이다. 한 순간의 체험이 우리를 예기치 못한 세계로 데려다 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냥 똑같은 산이다.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정작 자신이 누군가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잊은 채. 또한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서둘러서 판단해 버린다. 하지만 브레송이나 세잔처럼 자신의 눈과 마음을 열어 오랜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는 자에게는 언젠가 세상이 마음을 열고 다가오게 되어 있다.

 

요즘은 모든 게 너무 빠르다. 도대체 느린 것을 못 견딘다. 지긋하게 기다리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도무지 머리를 굴려 생각할 틈도 느낄 틈도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감각은 웬만한 자극에 꿈쩍도 않는다. 점점 더 자극적이고 더 빠른 것을 찾게 된다. 이건 감각이 확장되고 느낌의 영역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 감각을 소모하고 둔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거기에 뭔가 있어서 저절로 보는 게 아니다. 사랑하니까 보이고 사랑하니까 느껴지는 것이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그대로 드러나 있어도 어떤 건 잘 보이지만 어떤 건 절대로 안 보인다. 눈에 불을 켜고 보려 하면 더 안보이다가도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저절로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보인다고 보고 안 보인다고 못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를 보고 못보고 느끼고 못 느끼고는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예찬할 수도 세상을 욕할 수도 있다. 요즘은 부모는 아이에게 아이는 부모에게 벽을 느낀다. 요즘은 이 벽이 점점 더 많아지고 단단해진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하지 않고 오로지 게임기와 휴대폰 텔레비전이만 시선을 집중한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집이 너무나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통하자고 만든 기계가 휴대폰과 텔레비전인데 그 수단이 우리를 점점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텔레비전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나 자신은 물론 부모도 친구도 잘 보지 못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은 다 볼 수 있지만 나 자신만은 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있지만 자기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자신이 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성찰한다면, 조금은 말과 행위를 가려서 할 것이다. 어떤 종교나 철학에서도 자기를 보는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대화하고 경청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느낌을 바꾸도록 혹은 전과는 다르게 보도록 유도함으로써 세상을 다르게 상상하고 건설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예술가는 아주 재미있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 하지만 그 거짓말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사람이다. 한번 크게 웃고 한번 크게 울 때마다 우리 안의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느낌은 모방할 수가 없다. 친구가 어떤 음악을 듣고 느낀 걸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따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느낌은 자신만의 것이고 자신이 만들어내는 능력이며 세상과는 만나는 자신만의 방식이다. 는 무엇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냐는 물음에 박제가는 이렇게 답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모든 것이 다 시입니다. 사계절은 변하고 온갖 소리를 웅성거리는데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소리와 리듬은 자유자재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런 현상을 깨닫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현상을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작가의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이나 우러러보고, 케케묵은 종이쪽지에서 근거 없는 찌꺼기나 줍는 글쟁이들이야 말로 근본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났다고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그 말을 듣지 않을 뿐이다. 마음을 열어 그 말에 잘 귀 기울이면 세상 모든 것이 예술의 재료가 되고 놀이의 재료가 된다. 남 따라 하지 마라. 공부에는 일등과 꼴등이 있지만 느끼는 데는 차별도 없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루는 장자가 친구와 함께 산을 오르다가 휘고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보게 된다. 함께 가던 친구가 그 나무를 보며 탄식한다. ‘어떤 나무는 좋은 땔감으로 쓰이고 어떤 나무는 좋은 가구가 되는데 이 나무는 아무 쓸모없이 버려져 있구나.’ 그 말을 듣고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나무는 땔감으로 베어지고 어떤 나무는 목재로 베어지는데 이 나무만은 아무 쓸모가 없는 덕에 살아있지 않은가? 세상은 이 나무를 무용하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이 나무야 말로 자신의 무용함을 잘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이것을 장자는 쓸모없음의 쓸모라고 말했다. 어떤 친구들은 공부 좀 잘한다고 자기가 잘났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재주도 없는 자신이 가장 못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난 이상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다. 공부라는 하나의 짓대로 볼 때만 잘나고 못나고가 있는 것이다. 그 기준을 떠나면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자. 쓸모없음은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일 뿐 절대적인 게 아니다. 하늘의 뜻 같은 건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들 자신이 여러분들의 쓸모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는 연습, 낯선 것을 피하지 않는 연습,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 싫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라보는 연습을 자꾸 해야 한다. 그러면 느낌의 폭이 훨씬 넓고 깊어질 것이다. 이 세상이 쓸모가 아니라 내가 꿈꾸는 세상의 쓸모를 남의 쓸모가 아니라 자신만의 쓸모를 만들어 보라.

 

누구에게나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의 순간들이 있다. 좋은 책을 읽었을 때, 좋은 음악을 듣거나 풍경을 보았을 때, 그 순간의 느낌을 바로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그렇다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내 말로 내 노래로 내가 가진 무언가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훨씬 많은 사람과 내 느낌을 나눌 수 있다. 무술인처럼 가수나 배우들처럼 꾸준히 배우고 쉼 없이 연습하다보면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처음부터 높은 곳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있다. 자르고 다듬고 쪼고 갈아서 광을 내기 전에는 어떤 다이아몬드도 그냥 돌일 뿐이다. 우리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는 원석이 있다.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연구에 따르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는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좋다거나 내가 슬프다 같은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성장하면서 점차 타인과 마주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른바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 정체성으로 나와 남을 구분 짓고 이로부터 고립감을 느끼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나를 잊게 만들 수 있는 열정적 사랑이나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갈망하게 된다. 나를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사랑하고 느낄 수 없다는 증거다. 사랑하고 느낀다는 건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이 세계의 무수한 존재들과 화학반응을 하며 살아간다. 화학반응을 한다는 것, 그것은 다른 것을 느끼고 내 안에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색, 무취, 무맛이더라도 다른 존재와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되면 천 가지 색, 만 가지 맛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는 건 누구나 갖춰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느끼는 것도 능력이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느끼는 거야 말로 생각하고 의지하고 행위 하는데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느낀다는 건 내 안에서 낯선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자신만의 세계에 꽁꽁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처받고 아파하는 게 훨씬 낫다. 그걸 통해 조금 더 단단해지고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순간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차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인간은 인간 자신을 넘어 만물과 교감할 수 있고, 유한한 경험을 넘어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감동을 주고 감동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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