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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다는 것(채운 글 ,정지혜 그림)

느낀다는 것1

병에 걸렸을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던 걸 안 하고 안 쓰던 부분을 쓰는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이처럼 어려운 게 없다. 기존의 리듬이나 생활습관을 한마디로 몸과 마음의 패턴을 통째로 바꾸라는 것이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병에 걸렸을 때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또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병에 걸리는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약이란 결국 우리의 익숙함을 깨는 것이고 유혹 대신 낯섬을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느낌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내가 느끼는 만큼이 내 세계인 것이다.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거나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려고하면 그 부분이 종양처럼 굳고 만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내게 걸어오는 세계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날 기뻐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아프게 하는 것들도, 편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낯선 것들도, 모두 우리에게 약이 될 수 있다. 다르게 느끼고 싶다면 먼저 몸과 마음을 전과 다르게 쓰는 연습을 해보라.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이전과 다른 식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여행을 하며 지은 글 중에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가 있다.

“.. 깊은 소나무 숲이 통소 소리를 내는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건 성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만 개의 축(거문고 같은 악기)이 번갈아 소리를 내는 듯한 건 분노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천둥과 우레가 마구 쳐 되는 듯한 건 놀란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뿐이다.”

 

똑같은 시냇물인데 매번 다른 소리를 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시냇물 소리가 매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는 있을 수 없다. 마음만큼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느끼는 만큼 마음에 저장되는 것이다. 잘 느끼기 위해서는 몸을 잘 돌봐야 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연암처럼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경험을 통해, 보고 듣는 것에만 집착하면 바른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듣는 게 아니다. 느낌은 눈과 귀로만 오는 게 아니라, 온 마음과 몸으로 전해져 온다.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눈이나 귀가 아니라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들으면, 세상은 아주 또렷한 모습으로 그 신비로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달빛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런데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는 달빛이 은은히 스며드는 세상의 풍경을 달빛이라는 음악으로 만들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어떤 인물에게 몰입하면 어느새 그 인물과 하나가 되어 웃고 우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느낌을 통해 우리 자신이 축소되거나 확대되는 경험을 하고, 다른 존재와 합체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뭔가 말하게 하고, 쓰게 하고 그리게 하는 거 아닐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단지 생각만으로는 위대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예민하고 남다르게 느끼는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우리는 느낀다. 공기를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인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춤추게 하는 것은 느낌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가 태어나려면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최초로 수정될 확률은 10-19승이다. 부모님이 태어날 확률 또한 마찬가지다. 엄마는 엄마의 부모에 의해 아빠는 아빠의 부모에 의해 태어난 것이고, 그 부모님은 또 각각의 부모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8대만 거슬러 가면 내 탄생과 연결된 선조의 수가 250명이나 된다. 더 거슬러 올라가 30대 위로 가면 내 탄생과 연결된 선조가가 무려 10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태어난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뿐인가? 인간은 엄청난 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고 나면 그 원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모두 재활용된다고 한다. 우리 몸속 원자들 중 상당수는 몇 백년 전에 살았던 인간의 원자일 수 있다. 우리는 전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의 인연으로 거의 기적처럼 지금 여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서 상상하고 느낄 수는 없다. 우리가 속한 시대의 느낌이 개인이 느끼는 방식 속에 어떤 식으로든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두 비너스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 시대의 비너스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이다. 그리스의 비너스는 우리에게 의 여신으로 이해되지만 다른 비너스 앨리슨 래퍼는 불구자로 규정된다. 왜일까? 그건 정상/비정상에 대한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밀로의 비너스상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팔이 없는 상태였다. 그처럼 앨리슨 래퍼도 팔 없는 채로 세상에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아름다움이 아닌 추함으로, 정상이 아닌 불구로 비하되는 걸까?

 

내 인생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이 내 느낌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 느낌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냥 느낀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르게 느끼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익숙하게 느끼는 방식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대해서 질문해봐야 한다. 나를 이루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이 세상의 흙과 물과 불과 공기, 그리고 이 세상을 떠도는 생각과 말들이 내 몸과 마음을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바꾼 것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조선의 재기발랄한 문장가였던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속인들은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모든 것을 파악하여 날마다 접촉하면서도 그 맛을 분간할 줄을 모른다. 혹자가 물맛이 어떤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은 아무 맛이 없다그러나 목마른 자가 물을 맛보면 천하의 그 어떤 맛난 것도 이보다 더하지 않으리라. 지금 그대는 목마르지 않다. 그러니 저 물의 맛을 무슨 수로 일겠는가?” 물맛은 물에 있는 게 아니라 물을 마시는 우리의 상태에 있다. 물맛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물과 만나느냐에 따라 물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유를 따지고 논리를 만들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발이 먼저 그들에게 도달한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세상을 구경하려는 자들에게는 어떤 느낌도 오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무시한 채 먼 곳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자들에게도. 잘 느끼는 사람들은 열심히 구하고 열심히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목도 마르고 배고 고프고, 그럴 때 바로 가까이에서 가장 맛있는 물과 밥을 찾게 되는 것이다.

 

고대의 축제는 공동체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중요한 장이었다. 평소에는 계급이나 성별, 재산에 따른 위계질서에 따라 행동하지만, 축제 때는 모든 경계를 넘어 사람들이 일체가 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놀이판이라든가 학교 운동회 같은 것도 일종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열심히 응원하다보면 어느새 같은 팀이라는 소속감이 생기고, 옆 사람과 아무 이유 없이 친해지기도 한다. 그게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것보다 자신을 잊은 채 한 덩어리 된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란 말 그대로 막힌 데를 뚫고 서로를 통과해 가는 것이다. 공감은 다른 두 세계 사이에 전류가 흘러 거대한 에너지 장을 만드는 것이다. 소통과 공감은 언제나 둘 이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느끼는 것은 고독한 행위가 아니라 고독을 넘어가는 행위이다. 혼자서는 느낄 수도 통할 수도 없다. 느끼는 것은 다른 것과 만나고 다른 것을 통과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다른 것이 되는 경험을 하며, 거대한 전체와 한 덩어리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울린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따로 또 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다름을 가지고 서로 어울린다는 것이다. 마치 심포니에서 하나의 악기가 다른 악기들과 어울리듯이. 소통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나와 같아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질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체로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계속 싫어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하고 해야 하는 건 바로 그런 내 기질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이다. 자기 기질을 지키면서 한길로만 가다보면 그야말로 고집불통이 되고 말 것이다. 느낌은 우리가 고집불통이 되는 것을 고체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느낀다는 것은 그저 막연히 어떤 느낌이 오는 것인 줄로만 아는데 그게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느끼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소망과 의지가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뿐만이 아니라 몸이 어떤 상태인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서도 느끼는 방식이 달라진다. 느낀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더 많이 더 깊이 잘 느끼는 사람들은 다르게 살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뭔가를 바라볼 때 어떤 시점 혹은 관점을 갖게 된다. 사건을 바라볼 때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건의 해석이 달라진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만 사물이나 사건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냥 그게 정답이라고 믿어버린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세상을 느낀다는 것, 무엇과 공감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갖는 것이다. 자기가 있는 자리, 자기의 생각, 자기의 믿음을 한번 쯤 벗어나보라.

 

살아가는데 무수히 많은 기술들이 필요하다. 잘 생각하기 위해서도 기술이 필요하고 잘 대화하기 위해서도 기술이 필요하며, 심지어 잘 먹고 잘 자기 위해서도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그 까이꺼 뭐 대충 생각해서는 답이 나올 리 없고, 잘 먹고 잘 자는 기술이 없으면 건강을 해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그 기술들을 연마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느끼는 것도 아주 중요한 기술 중 하나이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몸은 건강한 게 아니라 심각하게 병이 든 거라고 한다. 감기感氣, 말 그대로 외부 기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외부의 기운을 어느 때 잘 느낄 수 있을까? 환절기는 계절이 바뀌는 때, 우주 자연의 리듬이 뭔가 크게 변화하는 때이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따뜻한 기운에서 찬 기운으로 급변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것이다. 기운의 변화를 느껴가면서 한번씩 그렇게 아파가면서 우리의 몸은 건강의 기술을 획득한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을 읽었을 때, 멋진 그림을 보았을 때, 아주 낯선 음악을 들었을 때,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아플 때가 있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다 틀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예전에 알던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시시해 지기도 한다. 그 순간이 바로 마음이 감기가 걸린 순간이다. 마음의 감기를 이겨내면 좀 더 성숙해지고 조금 더 큰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말하자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또 하나의 기술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루스트라는 작가가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야 말로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느낄 준비가 된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내가 소통하는 세상이 커지고 그만큼 우리 자신도 커진다. 그럼 어떻게 되냐고?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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