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가 만발한 산기슭을 걷는다. 동이 터 오기 시작한다. 노란 산수유나무 사이로 뿌연 빛이 내리고, 가끔 새들이 소곤 되는 소리를 듣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부작 사부작 흙 밟는 소리가 들린다. 공기는 좀 싸늘하지만 상쾌하다. 생명의 기운을 품어내는 숲에서 청정한 음이온 때문인지 몸은 날아갈 듯 가볍다. 내 온 몸의 온 신경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봄날 숲속의 아침을 느낀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간이다.
사회에서 은퇴하고 나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내 편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렸고,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이 외로워질 때가 있다. 내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서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아는 건 뭘까? 이제 더 이상 어딜 가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스산하고 흉흉하기까지 하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시당한다는 느낌은 모두가 나를 따돌리고 있는 것 같은 참담한 고독감으로 이어진다. 그저 늙는 일밖에 안 남은 세월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한다.
어떻게 살다 죽을 것인가? 누구나 바라는 것은 건강하고 독립적 삶을 유지하며, 남에게 의존하거나 병원에 신세지지 않고 잠자다 죽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다. 의료기술과 더 나아진 삶의 환경으로 기대수명은 연장 되었지만, 연장된 삶의 대부분을 병원에 의존하거나 남에게 의존하는 삶을 유지한다. 노년에 종합병원이 되어 비참하게 살다 죽는 경우를우리는 흔히 본다.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야 자주독립적自主獨立的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건강한 육체란 내 일상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최소화 하는 것이며, 건강한 정신은 새로운 나날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내 세상이란 내가 의식하는 만큼이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인간의 의식도 새롭지 않으면, 새롭게 의식하지 못하면 죽어가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내 의식은 매일 새로워진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게 되면, 나와 관계 맺는 것이 없다면,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는 지루한 삶을 견뎌야 한다.
노년의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운동이다. 좋아하는 취미활동이 있으면 좋지만, 아니면 자신에 맞는 운동을 찾아 일상으로 행해야 한다. 그리고 친구가 필요하다. 그 친구란 함께 하면 나를 성장하게 하고 나를 새롭게 하고,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성찰하게 하며, 내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함께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친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뿐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이든 나의 의식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세상만물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
현재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책이다. 책은 친해지기 쉽지 않은 친구다. 모든 친구가 다 그렇지만, 책도 내가 친하고 싶다고 친할 수 있는 친구도 어니고 돈이 많다고 친할 수 있는 친구도 아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있어야한다. 서로 공감하고 교감해야 한다. 책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금방 책과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그 책과 소통할 채널이 있어야 한다. 책은 나를 위로해주고 감동을 주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이야기해주고, 내 삶의 지평을 확장해주고, 깨달음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나를 성장시키는 최고의 친구다.
우리 삶에서 물론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물질 때문에 에너지를 너무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삶을 즐길 에너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노년의 행복한 삶이란 누군가에게, 무엇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로 인해 삶의 에너지를 얻고, 존재감을 갖고, 행복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축적해 놓은 물질, 재능.. 그 모든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나눠주고 홀가분하게 살다 떠나는 삶이 멋있고 우아한 삶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