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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행복에 대하여

이른 아침에 사패산에서 바라본 도봉산 능선이다. 다른 사람에게 별것 아니지만 내가 뭔가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어깨도 목도 다리도 아프다. 확대해서 찍었으니 잡티도 많고 화면이 많이 거칠다. 요즘은 그 사진이 그 사진이다. 발전이 없다. 차라리 거친 그대로가 좋다.
 
우리는 일상의 많은 것들을 스마트폰으로 처리한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무엇이든 이뤄지는 세상이 좋은가? 스마트폰의 편리함이 온 몸으로 살아야 하는 호모사피엔스에게 좋기만 할까?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등장하여 스마트폰과 인공지능과 빅데이타가 융합되면 그때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그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때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2000년대 스마트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공지능은 정말 인간이 만들어낸 神이 될 것이다. 神이란 인간의 문제에 답을 주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신에게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神에게 빌었다. 어떻게 해야 불행을 피할 수 있을지 물었다. 아직 미완성인 인공지능을 철장 속에 가두어 놓고 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탐욕적인 인간들이 그 괴물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그 괴물이 어떻게 진화할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인간은 그 괴물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든 돈을 벌려고 할 것이고, 서로 먼저 세상을 지배하려 할 것이다. 앞으로 10년 후쯤 인공지능을 스마트폰처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대부분의 인류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인류의 종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일 것이다. 우리 호모사피엔스 종은 그때 사라져가는 원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피로사회'의 저자 독일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방한하여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행복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예전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 투명사회’라는 책을 관심 있게 읽었다. 이번 강연은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한 번 생각해볼 주제라 흥미 있게 들었다. 내가 듣고 이해하여 정리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내 잘못이다.
 
“잠깐 낮 잠 자는 정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철학적 삶이 올바른 길이라고 제시한다. 사유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지금과 다른 삶을 찾아 관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라. 공부하는 삶을 살라. 학문이란 직장을 위해서만도 아니고 돈을 위해서도 아니다. 좋은 삶을 찾기 위해서이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엄청난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정보사회는 변화를 너무 가속화시켜 지속성이 없다. 진리는 없고 정보만 있다. 방향도 의미도 가치도 없다. 정보란 무엇인가? 지식은 익히는 것이라면 정보는 순간적인 것이다. 정보는 지식이 없는 삶을 만든다.
 
디지털 사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의식,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 나는 행복은 몸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쁨과 행복은 다르다. 소소한 일상에서 순간순간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기쁨은 단순한 느낌이라면 행복감은 손을, 온 몸을 사용하는 행동을 할 때 느끼는 것이 행복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여 뭔가를 이루었을 때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땅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땅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나의 경우 나를 정화시키는 것이 음악, 피아노 연주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나는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피아노는 몸으로 치는 것이며 그때 내 몸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 낯설음, 저항하는 대상과 소통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동문이고 모든 게 투명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쉽게 신속하게 처리하려 한다. 저항이 없고 경이로움이 사라졌다. 스마트폰은 모든 저항, 경이로움을 없애고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대가 사라졌다. 스마트폰은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스마프폰을 도구로 사용해야지 내 머리를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도구가 되어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인공지능도 인간의 도구가 되어야지 인공지능에 종속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다.
 
상대가 있어야 나를 성립시킨다. 상대가 없으면 나를 성찰하지 못한다. 상대가 있어야 자아가 생긴다. 상대가 없는 ‘나’는 없다. 상대 object라는 단어는 ‘맞서다, 저항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상대는 나에게 맞서는 존재다. 세상이 디지털화 되면서 상대가 사라졌다. 나에게 맞서는 상대가 없어졌다. 나에게 저항하는 상대를 없애버렸다. 우리는 ‘좋아요’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은 것에 굳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의 사고와 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스마트폰으로, 디지털화로 우리의 사고, 의식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인간은 행동하는 동물이 아닌 소비하는 동물이 되었다. 디지털이란 손가락이 그 어원이다. 몸으로 행동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소비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행위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에 손으로 소비하는 존재로, 손가락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다.
 
주인이 나를 채찍질하면 나는 저항한다. 우리는 내가 채찍으로 나를 때리면서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비하는 가축이 되었다. 노예는 저항하지만 가축은 울타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통치자에게는 그것이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세상을 내 욕구에 종속시키려 한다. 나와 관련 없는 세계, 나를 부정하는 세계는 무시한다. 그러면 오히려 우울증이 온다. 우울증은 내 세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타인은 손가락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손가락질이 세상을 없애고 나를 없애고, 타인을 없애고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든다. 타인은 나에게 저항하는 존재이고 경이로움을 갖게 하는 존재이다. 손가락질만 하는 우리는 육체를 잃어버렸다. 몸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정보는 나타났다 사라진다. 정보가 지속성이 없으니 사유가 없다. 그냥 지배수단일 뿐이다. 인간은 점점 사유할 능력도 여유도 없다. 정보를 따라가기 바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보에 불신이 많다. 민주주의와 이성은 느리게 작동한다. 디지털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이성이 파괴된다. 정보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허무감만 생기게 한다. 정보는 자각만 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서로 신뢰하지 못한다. 서로 믿지 못하니 약속도 못한다. 의미도 없다. 삶이 순간적이 된다. 모든 것이 충동적이다. 머무름, 멈춤이 필요하다. 천천히 바라보고 머물러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한다. 순간에 머무는 우리는 삶을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은 머물러야 한다. 여기에 잠깐 저기에 잠깐 있는 것은 경험이 아니다. 사유가 없어지고 깨달음이 없어지고 공동체 의식도 없어진다.
 
진리가 한 사회의 구심력이 된다. 정보사회에 진리가 없으니 사회의 구심력이 없다. 정보지배사회의 전형적인 인물이 도날드 트럼프다. 진실의 특징은 지속성이다. 오히려 정보가 폭탄이 되어 삶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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