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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

나는 산을 올라 도시를 내려다 볼 때 마다 경이로운 점은 ‘어떻게 천만이 넘는 인간들이 함께 저렇게 모여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 우려되는 점은 ‘만일 도시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면 똥오줌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무엇을 먹고 살 것이며, 식수는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전기와 가스공급이 중단되면 어떻게 될까? 또 삶의 많은 부분을 정보통신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통신이 두절된다면 어떻게 할까? 인공지능이니 빅데이터니 사물통신망이니 로봇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능인 스마트폰이 작동하지 못하면. 카드와 돈만 가지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무슨 인터넷게임 같이 쉽게 이야기한다. 실시간으로 전쟁을 중계하는 미디어에 익숙한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괴물로 만드는지 알지못하며,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상세계에 익숙하다 보니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첨단기술의 발달로 전쟁무기의 살상 능력은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이 도시에 모여 살아가고 또 국가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나 자신이 아닌 외부 무엇을 생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우리들은, 옛날 우리 조상들보다 전쟁에 아주 취약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도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면 파충류 뇌만 작동한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재앙들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다만 나와 상관없는 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국민을 전쟁으로 내모는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다. 우리 세대도 그렇지만 우리 자식들도 대부분 복종과 순종을 미덕으로 교육받았다. 그들이 사회지도층이 되었고, 정치인이 되었고 사회정의를 다루는 판검사가 되었다.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회체제에서는 자신이 악마고 괴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악마가 되고 괴물이 될 수 있다. 지도자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홀로코스트 같은 범죄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 사회학자 어비 고프먼은 인간들이 어떤 척도들에 의거하여 사물들을 관찰하고 있는지 연구하였다. 그는 어떤 사건들과 그 행위의 감성적 의미에 대한 해석을 위해 사람들이 ‘이미 사회적으로 특정 지어진 특정 기준들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위한 구성, 원칙들을 '프레임'이라 불렀다. 프레임이란 사건을 당한 사람들이 그 사건에 보이는 반응들을 규정하는 순수한 객관성이 결코 아닌, 대신 사건의 지각이 그 안에서 정돈되는 어떤 ‘지시프레임’이라는 것이다. 지각들, 해석들, 그리고 결단들을 조작하는 지시프레임에는 의식된/되지 않는 지각 및 해석과 더불어 미리 전제된 배경, 가정들, 사회화 된 태도들, 그리고 습관적 형식들이 관계되어 있다.
 
해석에 관계되는 것은 인간들이 처해있는 각각의 상황조건들, 그들의 학습된 지각 및 해석기준들 그리고 위협, 재난과 전쟁을 통한 그 기준들의 변화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이 현실에 대한 더 추상적인 개념들과 모델들 - 종교적 신념, 전쟁과 평화, 정의와 불법, 의무감, 복수 등-이다. 그 때문에 똑같은 상황이라도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또는 서로 상이한 시점, 시각 때문에 완전히 다르게 지각되고 해석될 수 있다.
 
1994년 4월과 6월 사이에 르완다에 사는 80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해된 사람들은 대부분은 투치족이었다. 투치족만이 대량학살에서 살해된 것은 아니다. 살해 행위에 대해 반대했거나, 투치족과 결혼한 후투족들도 살해되었다. 4월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에 대한 공격으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적들이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방어해야만 하기 때문에 학살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와 하나의 의미를 결부시킬 수 있다. 투치족에 대한 인종살해는 거의 대부분 다수족인 후투족 중에서도 아주 정상적인 구성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군부, 고위관료 그리고 행정관리들은 명령만 전달했고, 살해해야 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리스트를 배부하기만 했다.
 
후투족과 투치족 두 부족들 사이에는 여러 갈등과 학살이 있었으며, 이 두 부족들은 사회적으로 결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두 부족이 혼재해 있었고 서로 결혼했으며, 함께 일하고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왜 인종들의 경계선을 따라 인종살해가 분출 되었을까? 감정의 근원적인 원인은 살인자들 자신에게는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대통령을 아주 개인적인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정치지도자를 마치 가족구성원처럼 보호자로, 아버지로 간주하고 있다. 그에 대한 살인행위는 그들 자신에 대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생명과 그들 종족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공격하고 살해해야만 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사회에서 위기사태는 언제나 극단적 폭력행위들로 귀결될 수 있다. 위기사태에서는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정짓는 기능들이 없다. 폭력 자체가 경계선 설정을 현실화시킨다. 서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그때 누가 현재 우리 편이고, 누가 과거 그들 편이었는지 분명하다. 극단적인 폭력상황에서 위협은 결과 자체에서 누가 누구에게 소속되느냐를 정의한다. 사람들은 사회적 변화과정들에서 종종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상적이고 예외적인지, 무엇이 예측 가능하고 무엇이 예측되지 않는가에 관해 자신들의 지각방식들과 변화되는 현실들과 더불어 변형되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주위 환경들과 조화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 (독일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의 ‘기후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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