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건너면서 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이른 아침 지하철을 타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아침 일찍 시작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케인즈의 에세이는 두 가지 예견을 했다. 두 가지 예견은 성장과 노동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쯤 우리는 하루에 3시간 이상 일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모두 만족시킬 만큼 충분한 물자를 가지는 순간에 도달했으리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여분의 여가시간을 현명하고 즐겁게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인당 실제소득은 케인즈가 예견한 것과 비슷하다. 노동시간이 생산성 증가에 비례하여 줄어들 것이라는 케인즈의 예견은 상식적인 추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계효용체감법칙에 의해 소득이 많아질수록 추가적인 만족도는 더 적어지므로, 일보다는 여가를 선호하리라 가정한 것이다. 한 시간 더 노동해서 얻어지는 효용보다는 1시간의 추가적인 여가가 주는 효용이 더 커지는 시점까지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노동자는 1주에 40시간 일한다. 케인즈의 추산에 따르면 1주에 15시간 정도만 일하고 있어야 한다. 케인즈는 사람들이 원하는 물질적 필요의 양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충분히 채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이렇게 믿은 까닭은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고 안락한 삶을 위한 객관적 조건인 필요는 양적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욕구는 순수하게 심리적인 것이므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우리가 지혜롭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여가를 활용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은 어찌 되었는가?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골프클럽에서 열리는 비공식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인맥을 쌓기 위해 파티를 열고, 휴가기간 동안에도 전자기기를 통해 사무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장들의 행동은 목적의식적 행동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그 자체의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사실 오늘날 풍요롭고 사치스런 문화에서 다양한 목적의식으로 인한 물질적 탐욕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더 바쁘게 서둘러야 하고 여유는 없어진다. 이러한 모순은 왜 일어날까? 다음 이야기는 러시아에서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블라지미르 메그레의 ‘아나스타시아 시리즈’의 내용 일부를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 노예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노예를 선동하려는 주동자는 항상 있었다. 단순히 다른 노예들을 선동하며 부추기는 주동자를 체포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항상 노예제도와 함께 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위협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통치자는 생각했다. ‘노예제도가 최고의 선善이라는 점을 모든 사람의 뇌에 못 박아야 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해서 온 백성들이 공간, 시간개념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예가 많을수록 국가가 강력하고 더 이익이라 생각하지만, 노예가 많을수록 항상 폭동을 걱정해야 하고 감시를 강화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는 게을러지고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도 생각했다.
통치자는 새로운 전략을 생각해냈다. ‘이제 새 날이 밝으면 모든 노예들에게 완전히 자유를 주고, 대신에 그들은 운반하는 돌 하나에 대한 대가로 동전 한 닢을 주어서 그 동전으로 음식, 의복 등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행복한 삶을 생각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노예들은 옛날과 똑같이 돌을 날랐지만 행복했다. 돌 하나라도 더 많이 옮기려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했다.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많은 동전을 모으려고 쉬지 않고 일했다. 노예 중 일부는 더 많은 일을 하기위해 마차를 만들었고 소규모 집단도 만들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돌을 나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물과 빵을 제공하며 동전을 모았다. 그런데 그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제 더 이상 주인이 없는 것 같았다. 노예의 주인은 그들이 짓고 있는 '인공세상'이었다. 그렇게 지난 수천 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제국이 명멸明滅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바뀐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도 돈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은 사람들이 돈이 권력과 행복을 줄 것이라 믿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여 더욱 굳게 믿고 확신하도록 신념을 만들어 주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형상을 만들면, 돈 많은 그들만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을 유혹할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유지된다. 어쨌든 인간은 환경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갈수록 돈에 더 구속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상품이 발명될수록 인간은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된다. 과학은 합리적인 것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이성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칼을 쥐어준 결과가 되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물 공기, 땅, 자연까지도 상품화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이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자들의 꿈이다. 인간들은 갈수록 머리가 아프고 걱정이 많아졌다. 돈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져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돈을 너무 많아도, 돈이 너무 없어도 돈의 구속에 자유로워지기는 힘들다. 물질적으로 최소한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물욕을 최소화해야 한다. 불교의 깨달음 해탈도, 하나님의 성령도 거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