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전범 재판을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과 그의 동료 장교들이 스스로의 책임을 부정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물어보면 이들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대답한다. 다시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냐'고 물으면 이들은 ‘상관의 명령, 부대 방침, 법이 그랬다’고 대답한다. 우리 행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돌릴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 막연하고 일반적인 이유: 다들 대학 가니까, 나도 대학간다.
* 상황, 진단, 개인적, 또는 심리적 내력: 나는 알콜 중독자라서 술을 마신다.
* 다른 사람의 행동: 아이가 찻길로 뛰어들어 아이를 때렸다.
* 권위자의 지시: 상사가 시켜서 고객에게 거짓말을 했다.
* 집단의 압력: 친구들이 담배를 피워 나도 피웠다.
* 내규, 규칙, 규정: 학교 규칙에 따라 너를 정학 처분을 내릴 수 밖에 없다.
* 성별, 사회적 지위, 연령에 따른 역할: 일하러 가기 싫다, 하지만 가장이기 때문에 가야 한다.
* 억제할 수 없는 충동: 초콜릿을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의 말을, 선택을 인정하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 ‘해야만 한다’는 표현을 ‘나는 --원하기 때문에 한다’고 바꿔서 말하라. 자신의 행동과 느낌, 생각에 대한 책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 나는 프랑스 작가이며 언론인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공감한다.
‘... 만약 파괴의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로 전하는 것도 연민을 막는 의사 표현 방법이다. 강요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벌이나 비난이 따를 것이라는 위협을 암시적으로든, 어떻든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는 생각이 어느 사이엔가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강요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자신들이 부모, 교사, 관리자라서 '다른 사람을 고쳐서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주는 일이다. 내 요구를 거부하는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벌을 주어서 그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어떤 행동은 상을 받을만하고, 또 어떤 행동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개념에서 말하는 것도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의 한 형태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런 행동을 했으니 처벌받아 ‘마땅하다’라는 문장에서 처럼 마땅하다는 말로 표현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나쁘다’ 규정하면서 그들이 그같은 행동을 뉘우치고 바꿀 수 있도록 처벌을 요구한다. 나는 사람들이 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꾸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변할 때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믿는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가를 알아차리기보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비교하고, 강요하고 판단하는 말을 배우면서 자랐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본성을 통제하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견해이다. 그런 교육은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느낌이나 욕구, 그 자체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 안의 생동감-느낌과 욕구-을 차단하도록 배운다.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 방법은 위계적이고 지배적인 사회구조에서 시작 되었고, 동시에 그러한 사회 구조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쁘거나 잘못됐음을 암시하는 도덕주의적 판단으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을수록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가 하는 판단의 기준을 외부의 권위자에게서 구하게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진실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느낌과 욕구를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온순한 하인이나 착한 노예가 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인간의 본성은 연민으로 서로 주고받는 것을 즐긴다.하지만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드는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방법'을 배우면서 자랐다. 우리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하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도덕주의적 판단이 그 한 형태이다. 삶을 소외시키는 말들은 우리의 생각, 느낌, 그리고 행동에 따르는 책임의식을 흐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강요로 표현하는 것 또한 연민의 흐름을 방해하는 언어의 또 다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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