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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철학 ( 롤란트

의미에 대한 질문(1)

인간은 '내일'이 아직 멀기만 한 어린아이들처럼 아무 의미없이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이른 나이에 인생 계획들속에 얽매여 버린다.  이는 마냥 즐겁기만 한 삶이 끝났음을 의미한다이제는 일이 무엇보다도 배우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해 큰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아직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미래 경력을 벌써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갖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좀 더 자라면 아이들은 자기가 커서 무엇이 될 것인지 혼자 생각하게 된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사내 아이들은 더 이상 대통령이나 우주인이 되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벌써 인생이 뭔가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저마다의 특별한 관심들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아이들의 관심에 맞는 직업에 종사수 있기를 바란다. 또 돈을 벌기 위해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모든 아이들이 미래를 그렇게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은 사람이 늙으면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여기 짤막하게 요약한 것처럼 반드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 어느 날엔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잇다. 또 우리의 삶이 단순하게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이 아니며, 생계를 걱정하면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일찌감치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근심은 평생 우리를 쫓아다닌다인간에게 자연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서운 존래로 여겨졌고, 인간의 삶은 예고 되었으며 두려운 자연재앙으로 인해 계속해서 위협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삶이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삶이 왜 소망하는 바와같이 편안하지 못한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와 낙원 추방에 대한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는 신의 계울을 어기고 선악에 대한 인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었다.  그 벌로 인간의 삶은 고난과 근심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 신화를 생각해낸 것은 히브리인들이었다. 고대그리스인들은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올림포스 신들이 무찔러 쫓아버린 티탄족 후손이다. 

 

그는 대한 도전으로 인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신들에게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사하였다.  신들은 로메테우스를 벌하였고 인간들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들은 늘 신들의 미움과 사랑을 계산해야만 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들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제사 올릴 때 혹시 실수로 어떤 신을 빠뜨려 그를 노하게 할까봐 아테네사람들은 '모르는 신을 위하여' 라는 비문을 새긴 제단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신들을 빠짐없이 만족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의 신화에서 철학적으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첫 번째는 삶에서 겪는 위험들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이다. 두 번째는 삶의 현 상태의 원인을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신 내지 신들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에 대해 말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언어는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면 개념들은 어디서 왔는가?  개념을 만든 것도 역시 우리들이다신이란 낱말도 역시 우리 인간이 만들었다. 그러면 낱말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에서 사람들이 신, 혹은 신들이라는 말로 누구를 혹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은 언제나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항상 인격적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고 말한다. 독일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구약성서 문장을 뒤집어서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하였다' 신이 우리와 구분되는 점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더 현명하다는 것, 인간이 힘들여 지식을 얻어야 하는데 반하여 신은 모든 것을 이미 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분리된 종교이고 이슬람교는 두 종교에서 자양을 얻었다.  각각 하나의 창조신을 인정하는 이 종교들을 우리는 일신교라 부르고,  고대 그리스인들의 다신교와 구분한다.

 

근대 초기에 자연에 내재한 법칙들에 대해 최초의 지식을 얻었을때 연구자들은 흥분하여 이로써 무한히 지혜로운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신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시계처럼 세계를 완벽하게 기계로 창조했으며, 이제는 이 시계가 얼마나 훌륭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관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신론理神論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편입했다.  훗날 과학자들이 물질 속으로 더 깊이 연구했을 때 이 현실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이후 그대로 지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신 항성계를 비롯하여 삶의 형식들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형식들이 나름대로 발전해 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창조주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시계공의 존재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공의 존재에 대한 가설과 추측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중세 철학자 윌리엄 오브 오컴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원칙 하나를 제기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불필요한 주장이나 추측, 가설 등은 모두 과감하게 삭제되어야 한다. 모든 철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에서 본 의미 있는 이 세계의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히브리인들은 원죄와 죄의 결과들로 삶의 괴로움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삶을 적대적인 환경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보았는데,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량한 땅에서 일생을 보내야만 하는 민족에게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이 낙원과 우리 현실을 구분하는가?  낙원에는 근심이라든가 병, 죽음, 악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잡아먹는 일도 잡아먹히는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