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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철학 ( 롤란트

인간은 얼마나 큰가? (2)

우리의 우주가 공간적, 시간적으로 무한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처음과 끝을 생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과 관련 되어 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크고 작음이나 빠르고 느림 그리고 그밖의 것을 규정할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 관련축이 되어 우리의 입장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절대적 크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크기, 결국 관계들만이 있을 뿐이다모든 것은 성대적인 것으로서 다른 그 무엇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서로 관련시키는 중심점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측정할 때 사용하는 모든 측도의 단위들을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관찰하며 큰 것과 작은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추운 것과 더운 것을 규정한다.  우리의 크기가 바로 지금 이 정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자는 무한히 작고,  은하계는 무한히 큰 것으로 보인다이는 마치 우리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의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보임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가 측정을 위한 척도를 사용한다'고 말함으로써 세계 중심에 설 수 있다. 측정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일이므로 우리는 필요에 알맞게 척도를 규정한다.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못하며 가능한 지식 전체를 두고 볼 때 우리의 현재 지식이 과연 어느 정도의 일부인지 조차도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어디까지 확장될까? 인식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원리에 따라서 인식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결부되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물들의 총체이다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연관 속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로 뻗어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인식이 세계의 한계와 맞물려 있다는 인식에 머물기로 하자. 분명히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현재 지식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다.  우리가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이 전체로 볼때 극히 적은 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이다새로운 인식을 하나 얻게 되면 그로부터 수많은 의문들이 새롭게 나타난다.

 

우리는 가장 최초의 지식들을 토대로 하여 그것에 완전히 의지하면서 거대한 지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다르다.  우리는 위로 계속 쌓아올리면서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기초를 다지며 때로는 주춫돌 몇 개를 교체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인간이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우리의 감정과 소망,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서 언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인간의 언어는 엄청나게 많은 표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 즉 지구에 사는 동물들의 언어보다 탁월하다. 동물들은 동료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은 모두 자기의 동료들에게 원하는 것이나 기분 등을 알려주기 위하여  풍부한 표현 가능성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들은 함께 놀이도 하고 구애도 하며, 서열을 정하는 싸움을 하면서 위협하기도 하고 굴복하기도 한다. 인간의 의사소통과 동물의 의사소통은 무엇이 다를까?  우리에게는 의사소통의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임의의 주제들애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는 이를 위한 도구이며 우리는 이 도구를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인간의 언어들은 세계의 사물들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사태를 다양한 언어들로 기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름인 낱말들과 이 낱말들로 명명된 것, 즉 사태의 개념을 서로 구분한다.  사람들은 종종 사태에 대한 개념도 없이 많은 낱말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물에 대해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 어떤 태도를 취하며 또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등을 아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 젖을 젖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젖이 무엇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지시할 말이 없을 뿐이지 고양이에게도 생선에 대한 개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개념과 파악의 의미를 해명함으로써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잘문과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들 자신이 연구를 통해서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연구과정 속에 있다. 우리는 세계 전체의 상을 얻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연관 관계만을 묻는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들의 거주공간을 알고 사냥 영역을 구획짓는 동물들도 그 정도는 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또 묻는 것이다.  세계 지평은 제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경계선이다. 그러므로 한계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그 지평을 더 넓히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아이들 특유의 성가신 질문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이가 있다.  사실 그 때문에 나는 우리의 철학산책을 시작했던 것이다.  왜 아이들은 '왜'라고 물을까?  분명히 아이들은 세계의 속성을 알고 싶어한다. 왜 풀은 초록색일까? 참 좋은 질문이다. 물론 풀이 노란색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햇님은 빛나나요? 얼마나 훌륭한 질문인가?  현대 물리학은 태양의 내부에서 빛을 발하게 하는 원자의 현상에 대해 복잡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왜'의 질문으로써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계의 속성에 대해 알고자 한다. 우리의 경험과학들은 이런 식으로 왜를 묻는 질문들에 답을 구하고 있다. 만일 누가 내게 산이 왜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각속에서 일어나는 운동과 관련하여 산악의 형성을 설명해 주는 일반 이론을 찾아볼 것이다.

 

우리의 철학적 관심을 끄는 것은 '왜'에 대한 질문이 갖는 의미이다. 우리는 현상에 대한 해명을 찾는다. 그리고 어떤 현상이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는지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현상을 해명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라고 물을 때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인과적 해명이다. 만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우리가 질문할 때 기본 전제가 된다.  우리는 특정한 현상들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삼아 우리는' 법칙'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법칙은 우리가 세상을 배우고 방향을 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용이하게 해준다. '왜'를 묻는 질문들은 사물의 원인들에 대해 물으면서 세계의 인과적 연관에 대한 해명을 얻고자 한다이 질문들은 현재의 것을 과거의 것에서 이끌어 내려 하기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가서 묻는다. 기대와 의도는 미래를 향한 것, 바로 목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왜 이 일을 합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가 하는 행위의 목적,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  그의 목표다.  우리는 어떤 행위나 현상들의 목표를 지향하는 모든 관찰방식을 목표 내지 목적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 목적론적'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