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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허버트 스펜

생각의 전환(1)

아이들은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친구가 되어주는 아빠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종일 놀아주는 일요일에는 특히 신이 날 것이다. 아이의 믿음과 사랑을 차지한 덕택에 찬성이나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만 해도 아이들이 함부로 굴지 않는다고 한다.  '더 심각한 잘못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하기전 몇가지 일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정립될 수 있고, 꼭 그래야 하는 관계를 짚어봐야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러한 관계가 정립되어야 심각한 잘못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그릇된 행동에 따른 불이익을 몸소 체험하면, 부모는 아이에게 반감을 갖거나 또는 아이에게 반감을 살 일이 없다.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 대안이 처음부터 꾸준히 지속되는 환경에서라면 돈독한 유대감이 조성될 것이다.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당근과 채찍, 격려와 꾸지람, 관용과 체벌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에 아이는 부모의 일관된 성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한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엄마는 가장 좋은 친구라고 일러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이라면 엄마의 말을 믿을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도 흔쾌히 그럴 거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란다’  ‘좋은 게뭔지는 너 보다는 내가 더 잘 알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크면 엄마한테 고마워할꺼야’  엄마가 입에 달고 사는 잔소리다. 말로는 아들의 행복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엄마의 행동을 보면 아들은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엄마도 비슷한 입장에 놓이면 그랬을 것이다.  가령 지인 중에서 걸핏하면 사기를 꺾고, 거칠게 핀잔을 주고 종종 불이익을 준다면 '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런 거'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는가? 엄마가 체벌을 피하고 자연적 징게에 대해 조언해 주는 친구의 역할로 돌아간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팔다리가 골절된다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면 강제로라도 말려야 하겠지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매일 겪게 되는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보호보다는 경고나 조언이 더 바람직하다필자의 대안을 꾸준히 적용하다 보면 부모에 대한 애정도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연적 반응을 적용한 규율이 허용된다면, 즉 야외에서 부상이 염려되는 말썽을 피우든, 집안에서 실험을 하든,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는 범위안에서 아이가 꾸준히 탐구할 있는 풍토를 조성한다면 부모에 대한 신뢰가 생길수 밖에 없다. 부모가 곧 믿음직한 친구라는 말이 행동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상생활을 통헤서 반복하며 체득하게 된다. 아이가 신뢰와 애정을 몸소 느껴야 가능한 이야기다. 많은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연신 저지르는 비행은 어설픈 교육 탓에 반감이 가시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하다. 정말 공평한 지도자라면 아이에게 바른 행동으로 잘못을 만회하라고 주문해야 한다. 물건을 훔친 경우라면 피해자에게 물건을 도로 갖다주고, 이미 썼다면 그와 값어치가 같은 것으로 배상하면 해결될 것이다.  어린이는 용돈에서 주면 된다.  반면 간접적이고도 심각한 결과는 부모의 불편한 심기다.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야말로 절도를 범죄로 간주하는 문명사회에서 자연적 반응중 가장 혹독할 것이다.

 

시대가 비교적 미개하고 아이도 비교적 미개한 시대라면 부모의 불쾌감은 더 잔혹할 것이고, 조곤조곤 대화로 해결하는 교양 있는 사회라면, 덜 잔혹할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표출하는 불쾌감은 부모자식간의 정에 비해 비례한다.  이러한 경우에도 자연적 결과를 체험하게 하는 대안을 적용해야 하며,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뉴는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때 진심으로 느끼는 가책의 정도가 상대와의 유대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닐까싶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화를 내면 가까운 지인에게 그랬을 때 보다는 신경이 훨씬 덜 쓰이겠으나, 가장 아끼는 친구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면 후회가 막급하지 않겠는가? 관계가 이미 틀어졌다면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체벌 당하거나 기회가 박탈될지 모른다는 이기적인두려움에 사로 잡힐테고 이를 당하고 나면 적대감과 증오심만 쌓을뿐이다.

 

부모 자식간의 유대감은 체벌과 박탈을 일삼을 요량으로 원칙을 따지는 유대감이 아니라,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유대감이요, 걸핏하면 못하게 말리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결과를 사전에 경고하고, 아이의 행동에 공감하는 유대감을 가리킨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은 곧 국정과도 같다. 잔혹한 폭정은 숱한 범죄로 이어지지만, 자유롭고 온건한 정치는 불화의 원흉을 피할 뿐 아니라, 감정을 누구러뜨려 일탈의 가능성을 낮추기 때문이다. 존 로크는 '가혹한 처벌은 교육적으로 유익하기는 커녕 해롭기 그지없다. 단언컨대 조건이 동일하다면 꾸중을 자주 듣는 아이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라고 역설했다. 자녀에게 성인군자의 면모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교양인이라도 소싯적에는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야만성이 발현되는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청소년이 갖추어야 할 예의의 수준을 너무 높게 잡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나 예의범절을 너무 서둘러 부추기는 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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