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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2

모든 것이 가능하며 타인이 항상 우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신비의 낙원에서 스스로 책임져야하고, 대답과 결과를 찾아야 하는 거친 현실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과정이며, 이때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거의 모든 문화는 권리와 의무를 가르치는 의식을 통해 이런 이행을 기념한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었지만 '지금부터는 너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해!'  그와 동시에 어떤 욕구는 제한되고 정해진 조건에서만 충족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은 아예 그럴 수 없다는 점도 가르쳐 준다. 이런 실존적인 문제들과 마주치는 순간, 전형적인 인간의 특징이 고개를 들이민다. 가능한 모든 대답을 생각해내는 창조성 말이다. 결핍 해소를 위해 종교와 예슬, 학문에 관심을 갖는다. 이중 무엇도 최종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대답을 찾는다.   대답을 찾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은 성공한 교육의 징후다. 우리가 받거나 주는 것은 결코 최종 답변이 아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수 있고 예상할수 있으며, 예외적으로 뭔가 잘못될 경우 항상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는 사회, 아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는 완벽한 존재이기에 아이에게 하지 말라거나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아동학대라고 생각하는 사회...이런 사회가 우리 곁에 와 있다. 모든 결핍은 해소될 수 잇다. 모든 것에 안성맞춤인 제품이 있다. 삶은 큰 잔치판이다. 단, 성공이라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조건이 고무젖꼭지 아이들에겐 낯설다. 그동안 모든 실망, 모든 고통, 모든 결핍을 부모가 제거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통제할 수 있으며, 모든 결핍은 제거될 수 있다. 그들은 성공을 거두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다. 젊은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성공을 원한다. 매우 능력지향적인 젊은이들은 경쟁심 역시 충분하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다. 이들만의 문제인가?  이들의 자기중심적 도덕 역시 우리 사회가 30년전 부터 들이밀고 있으며, 그 사이 가정과 학교까지 점령해버린 지배적인 모델의 결과이다. 교실에 자질이라는 주문이 울려퍼지면서 장애학생과 노동불능 학생을 미리미리 추려내는 일이 학교의 부업이 되어버렸다.

 

20세기가 남긴 교훈은 독재는 어떤 행태건 비판적이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성장을 차단하는 이념을 강요하기 위해 교육제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가치중립적인 교육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후광으로 인해 권위에 대한 과도한 의심이 자란 나머지 교실에서도 서둘러 권위를 추방했다. 이런 교육의 진공상태야말로 경쟁모델이 꽃을 피울수 있는 옥토였다. 직장에서 필요한 능력을 먼저 생각하라. 그런 능력을 학교에서 최대한 키워줄 수 있을지 고민해라. 그래야 우리 젊은이들이 일체의 종교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짐을 벗어던지고, 자기 길을 찾아갈수 있을 것이다. 능력지향적 수업의 출발점은 직장에서 필요한 자질의 양성이다. 재미있고 현실에 가까운 환경에 놓아두면 아이들은 저절로 배운다. 아무것도 미리 정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이 아이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저절로 이루어진다. 과거의 교육모델은 젊은이들이 나이든 권위자에게 광범위한 지식과 문화를 전달받는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른들은 권위를 바탕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지식을 전달했다. 그러나 요즘의 자질모델은 개인을 타인을 이용하여 능력을 키우는 자유로운 경영자로 본다. 경제용어가 교육은 물론이고 인간관계, 종교 그리고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언어사용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오늘날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기관리와 기업가 정신이다. 젊은이들이 자신을 미니 기업으로 보아야 하며, 경제적 의미 차원에서 지식과 능력이 처음이자 마지막 심급이다. 이로써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가치에서 해방시키고, 일체의 도덕적 독재를 폐지하려는 노력을 통해 능력지향적 수업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완벅하게 교실로 끌어들였다. 그러니 이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입에서 매사 그래서 무슨 득이 돼요?’  ‘나한테 무슨 이익이 되나요?’ 라는 질문부터 튀어나온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가 전달한 메시지를 정말로 잘 이해한 아이들이니 말이다. 

 

젊은이들이 연대감이라고는 모르는 경쟁적인 개인주의자로 자란다면, 이는 경쟁과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교육의 결과물이다. 요즘 아이들이 이기적이고 물질만 탐한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제도와 교육학이 이걸 얼마나 조장했는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알아서 올바른 규범과 가치를 체득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아이들은 주변환경의 윤리를 받아들인다. 모든 형태의 수업은 가치를 전달한다. 권위가 쓸모없다는 말은 교단에 서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선 20년전부터 소위 기치중립적이고 능력지향적인 교육이라는 꼬리표를 매단 채 신자유주의 사상이 아무런 여과 과정없이 우리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가 날로 늘어가는 현실이다. 열 살만 되어도 발써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향후 정체성은 패배감 위에 세워진다. 이들중 몇몇은 그나마 저항이라도 해보지만, 대부분의 패자들은 불안에 시달린다. 자폐증상을 보이거나, 우울증을 앓거나, 자제하지 못하고 물건을 사댄다. 이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교사들 역시 자신을 패자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자질이 떨어진다 해도 요즘 경제에서는 별 타격이 없을 것이다. 의사에서 미장이까지 대부분의 직업이 이제 전문지식을 크게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탈숙련화를 떠들어댄다. 컴퓨터와 기술이다 알아서 처리해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너무 비판적이지 않는 중간 정도의 숙련공이다. 요즘 교육제도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보장하는 과정에 따라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훗날 실제로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현장에서 배웠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험도, 휴가도, 인간관계도, 직장생활도 모두 성공해야 한다. ‘잘 사냐?’ 이 질문은 내심 공동체 생활을 강조한다. 반면 성공이란 개념은 훨씬 더 개인적인 의미를 띤다. 현대의 계명은 측정 가능한 효율성이다. 이는 현대의 최고 사제인 경영자들의 만트라(진언: 힌두교와 불교에서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신성한 말)이기도 하다. 이들의 만트라는 적응이다. 적응을 시키기 위해 이들은 독자적 버전의 '등수매겨 내쫓기' 시스템을 고안했다. 다른 한편으로 효율성이란 개념은 더 짧은 기간내에 거두는 이윤이다. 그러나 객관적 증거를 제공하다는 말로 일체의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 숫자와 통계자료의 뒤편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이런 관점의 사상은 누가 봐도 뻔하다. 성공이 새로운 도덕의 기준이라면, 새로운 비도덕적 인간은 실패자이다. 개인은 자기 인생의 경영자로서 자기 노동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보수도 더 많이 받게 된다. 당연히 이런 기회를 베푼 기업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지며 소속감도 커진다. 노동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더불어 책임의식도 높아진다. 자신의 노동뿐 아니라 기업 전체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직원들은 기업의 일부이다. 그러나 불과 몇년안에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선다. 최고의 인력, 즉 가장 생산적인 인력들만 보상을 받는다. 이런 목적을 위해 평가시스템이 개발되고, 이제 이 시스템이 품질기준을 하달한다. 이 모든 것은 빠른 속도로 하향식 품질지침서로 흘러들어가 일체의 주도성을 약탈한다. 창의성과 자율성은 사라지고, 품질검사와 직원면담, 회계감사가 도입된다. 자기결정권의 상실은 노동자의 참여의욕을 떨어뜨리고, 책임의식을 약화 시킨다. 야근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적절한  보상을 받고서야 하는 것이다. 예전 동료는 경쟁자가 된다. 책임의식뿐 아니라, 기업에 대한 충성심도 자취를 감춘다. 결국 낮은 수준의 도덕만 남는다. 조직과 개인이 서로 대립한다. 이런 부정적인 변화의 영향으로 노동윤리는 사라지고, 공동체 윤리 역시 자취를 감춘다. 우리 스스로 노동을 결정할 수 없는 이상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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