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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1

드 발은 영장류는 공감하고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지만, 환경이 이런 행동을 지원할 경우에만 그렇다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다른 환경에선 극도로 잔혹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정체성은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인물이, 단단한 애착관계를 조성해주는 안정된 환경에서 최고로 발달한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관성있게 그들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려주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정체성의 특성은 각자 성장하는 사회집단, 특히 그곳의 대표적인 관점, 만날수 있는 서사에 좌우된다. 이런 관점은 항상 윤리적 성격을 띠고 무엇보다 규범과 가치를 포함해서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세대전만 해도 가정은 가까운 주변과 힘을 합하여 정체성 형성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다. 아이가 가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우리는 지배서사와 그 서사에 내포된 규범과 가치를 정체성 형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반영의 상대는 이제 더 이상 부모가 아니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면 모니터다. 그것이 공공장소에까지 보급된 이후 우리는 도저히 모니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리고 언론은 물리칠 수 없는 복음을 전달한다. 평면 모니터는 물론이고 언론 역시 그 자체로 비난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시장을 지배하는 그들의 지위다. 현재를 즐겨라! 그게 뭐가 잘못되었나?  문제가 있는 청소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문제와 싸우는 성인의 슷자도 날로 늘어난다. 많은 이들이 장애를 겪고, 또 많은 이들은 위험하며, 그중 몇몇은 둘다에 해당한다. 아마 다음의 글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 요즘 젊은이들은 사치를 좋아한다. 예의가 없고 권위를 무시하고 어른을 공격하지 않으며, 일은 안하고 수다만 떤다....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큰소리만 치며... 스승를 거역한다’ 이 말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그러니 유사이래 한탄의 핵심은 같다. 젊은이를 보며 느끼는 노인들의 소외감은 문화의 변화를 통해 정체성이 바뀌고 말았음을 암시한다. 새로운 세대는 실제로 이전 세대와 다르다. 왜 새 세대는 다를까? 어쩌면 단순한 세대갈등 이상의 무언가가 숨어있는 걸까?

 

교육이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간단하게 표현해서 아이가 부모의 규칙을 물려받는 과정이다. 식탁예절에서 몸관리방법과 성규범을 거쳐 정치의식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부모의 규칙을 차근차근 물려받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부모의 규범과 가치를 지켜보며 자라고, 커가면서 서서히 더 넓은 환경으로 눈을 돌린다. 언어 차원은 물론이고, 벌과 상을 포함하는 행동차원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랑이 담긴 관심은 최고의 상이고, 관심의 박탈 및 사회적 배제는 가장 효과적인 벌이다. 물질적인 보상과 체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와 무력함의 증거에 불과하다. 때로 아이들의 요구는 부모에게 극도의 부담이 되기도 한다. 세 살만 되어도 아이들은 이런 권위에 도전장을 내밀며, 경계를 더 넓힐 수 없을지 계속 부모를 시험한다.

 

화를 내고 발길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수치스러워하는 등의 결과 역시 게임의 일부이다. 이 과정에서 부모는 상당한 인내심과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가 사랑이 넘치는 안전된 환경에서 자랄 경우에 5세만 되어도 외부 규칙을 받아들여 내면화 하고, 이를 점차 정체성의 일부로 삼는다이러한 내면화는 도덕적 의식, 양심의 기초가 된다. 학교와 다른 사화환경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미약하던 내면화가 점차 강화된다. 그 결과 아이는 점점 더 환경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아이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올바른 결정을 배우는 과정에는 부모 외에 다른 규범과 가치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육은 교양 즉, 교육과 문화적 성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이지만 자연과학적 지식과는 다른 형태의 지식이다. 고대 그리스의 지혜에 더 가깝다.

 

법적 성년이 되자마자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진다. 도덕적 규범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내면화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한 시민, 완벽한 사회구성원이 되어 책임과 의미룰 동시에 지는 것이다.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사회가 개입하여 처벌하거나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분류해 버린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달리 이렇게 자동적으로 어린이 되지 못한다. 믿을 만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네달란드 성인 네명중 세명은 요즘 아이들을 잔혹하고 비사회적이며, 음험하고 말을 안듣는다고 생각한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네덜란드 아동의 14%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너무 많은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가지 요소가 눈에 들어온다. 부모와 가족의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급격하게 줄었다. 노동 구조상 안정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아이들이 점점 줄고 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환경과 보호자가 바뀐다. 심할 경우 하루에 몇 번씩 바뀐다. 권위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아이들의 불안을 가중시켜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애착능력을 키우지 못한다. 자신도 믿지 못하고 남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광고로 뒤덮인 언론은 올바른 제품만 사면, 모든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쉬지 않고 송출해댄다. 이렇게 권위는 사라지고 환경은 광고로 뒤덮이니, 아이들을 다루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거울을 내미는가? 그 거울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성공만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로 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비난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노력하지 않고, 일도 안하려고 하고, 과실만 따먹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거울을 들이민다. 이들이 우리를 키운, 우리와 함께 성장한 지배서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적절한 인력을 구하지 못해서, 또 며칠 출근하고 때려치우는 젊은이들 탓에 아주 죽을 지경이다. 일은 너무 힘든데 보수는 너무 적으니 차라리 실업수당을 타겠다는 식이다. 이것들은 실패한 젊은이들과 더불어 오늘날의 지배 서사가 교육을 통해 전달되면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모든 욕구, 모든 욕망은 완벽하게 충족되어야 하며, 소비를 통한 향락이 지상최대의 목표라는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몇년동안 이런 기대를 품고살아간다. 어떤 집단은 영원히 이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왜 그런지 알려면 낙원 같았던 아기 때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바람직한 경우라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기의 탄생을 조건없이 기뻐한다. 아기인 우리의 반응은 반사적 행동이며, 우리의 생존방식은 괴로울 때마다 우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준다. 그러나 점점 성숙해지면 이런 생각도 점점 변한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들거나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엄마가 모든 것을 해주던 옛시절로 돌아간다. 정상적으로 애정을 갖고 자식을 대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실망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떤 현실도, 어떤 제품도 우리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완벽한 답을 줄수 없다. 교육의 질은 한 아이가 피할수 없는 실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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