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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엔론사회1

불경기, 치솟는 실업률, 금융위기, 파산직전의 국가들..... 이런 상황에 각국이 내놓는 전형적인 정책은 예산삭감, 복지예산 축소 그리고 기생충 같은 정신상태를 막기위한 조치들이다. 이를 통해 마치 일하기 싫어하는 실업자들, 너무 높은 임금, 너무 이른 퇴직연령이 모든 위기의 원인인 듯한 인상을 전달한다. 북유럽인들은 남유럽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대고, 자기 땅에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과 망명자를 비난하며, 젊은이들은 베이비 부머를 탓한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내가 남보다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우리의 교육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가격도 저렴하며 질적 수준도 높다. 우리의 신문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쓸 있다. 의료시설 및 복지제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며 교육수준과 기대수명도 높으며 우리는 매우 건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물질적으로도 매우 안락하다. 과거 상위계층의 질병이었던 당뇨병, 비만, 심장질환은 오늘날 낮은 사회계층에서도 흔히 걸린다.

 

한마디로 지금 서구인들은 역사상 가장 잘 살지만 가장 기분이 나쁘다. 이런 사실에는 설명이 필요 없고, 우리는 이런 설명을 쉽사리 책임전가로 왜곡한다. 우리의 한탄은 무엇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이 무기력하다는 점에 집중된다. 버릇 나쁜 아이들, 사방에 널린 기생충들 같은 말들은 단골술집에서 전쟁 때를 들먹이는 할아버지들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메뉴다. 그 시절엔 그랬지... 그 시절엔 적어도 진짜 문제가 있었다. 지금처럼 문제 같지도 않은 가짜 문제가 판치지는 않았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수세기동안 공동체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이 논리의 라인을 따라가면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영혼없는 도구적 합리성에 모든 책임이 돌아간다.  현대인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정체성도 기댈 언덕도 없다. 해결책은 새로운 거대 서사의 구상에 있다.우리가 함께 믿을 수 있고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길러낼 수 있는 거대 서사말이다.

 

옛날이 더 좋았어! 이런 생각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프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특히 이런 기억이 오해를 기반으로 한 낭만주의와 결합될 경우 더 믿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사람들의 정체성에 극도의 불만을 품고서 과거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면, 이는 단 한가지 의미가 있다. 즉 새로운 정체성이 주도권을 쥔 것이다. 나아가 새로운 정체성의 방향을 잡아주는 새로운 지배 서사가 권위를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구에서는 최근까지도 종교가 그런 서사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요즘 유행하는 이 말은 곧 새로운 서사의 새로운 규범에 복종하라는 뜻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은 네가지 주요측면의 상호작용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정치, 종교, 경제, 예술 이다. 그중에서 정치와 종교가 권력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이제 정치가들은 개그맨의 먹잇감에 불과하고, 종교는 자살폭탄 테러범이나 성추행이나 떠올리게 만든다.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경제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인간상, 우리를 둘러싼 거울을 요약하면 아마 이럴 것이다.

 

‘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 노리는 경쟁하는 존재다. 그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된다. 모두가 정상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최고의 결과를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국가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 공동의 자유시장에서 더 값싸고 질 좋은 제품과 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받게 될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 옳다. 개인의 선공과 실패는 오로지 자신 노력의 여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모두는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에 스스로 책임을 진다. 따라서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급속도로 발전하는 지식경제로, 유연한 능력을 갖춘 많이 배운 인간이 필요하다. 대학졸업장이 하나면 좋고, 둘이면 더 좋다. 평생 공부는 의무다. 모두가 쉬지 않고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경쟁은 무자비하다. 때문에 직원면담과 끊임없는 평가 역시 어쩔수 없는 필수조건이다. 지휘봉은 중앙경영의 보이지 않는 손이 쥐고 있다. ’

 

여기까지가 오늘날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더불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거대 서사의 요약본이다. 과거에는 경제가 종교, 윤리, 사회의 조직들로 이루어진 전체 조직에 끼여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선 그렇지가 않다. 윤리가 사회가 시장에 복종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이론으로 그치지 않는 훨씬 더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다. 아흐터 후이스는 신자유주의가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똑같이 현실의 가장 충실한 모사라고 자처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흐터후이스는 정통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전자는 국가와 사회의 엄격한 분리를 추구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국가를 소위 자유시장에 복종시키려 한다. 지난 30여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정체성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나? 이 시스템은 우리의 모든 개인적, 집단적 욕망을 거스르면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식민지화 했나?

 

신자유주의는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다. 공산주의, 민족사회주의 같은 다른 이데올로기들처럼 혁명적인 개입을 통해 급격한 변혁을 이루려하며, 그 대가로 한 세대 전체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잇다. 바로 이 일을 해낸 이들이 소위 시카고 보이스이다. 밀턴 프리드먼에게 배우고, 고국인 칠레로 돌아가 독재자 피노체트와 함께 칠레를 신자유주의 실험장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불황과 불평등을 불러온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이다.

 

능력주의 자체는 나쁘지 않다. 능률을 끌어올리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능력주의의 유용성은 대부분 환경에 좌우되며, 당시만 해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미국의 경우 능력주의는 역사도 더 오래 되었고, 방식도 전혀 다르다. 접시닦기가 백만장자가 되고, 신문팔이가 미디어왕국 제왕이 되는 신화, 최신버전은 실리콘벨리의 차고가 인터넷 대기업의 요람이 되는 신화다. 한마디로 아메리카 드림이다. 미국의 전통에서는 이를 순수하게 경제적으로 이해한다. 비즈니스에서 국가가 손을 떼라는 의미다. 반면 유럽의 경우 정치적 의미가 더 강하다. 정치적 권위가 국민에게 어떤 세계관도 강요해선 안된다는 것이다경제적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지적인 업적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실에서는 최단기간 안에 사회적 유동성은 마비되고 빈부격차는 심해지며, 자유는 보편적인 공포에 자리를 내줄수 밖에 없다. 원래 추구하던 바와 정반대 결과가 나타난다. 실패의 원인은 두가지다. 하나는 만인의 출발 기회가 동등하다는 가정인데 이는 망상이다. 다음은 이 시스템은 자기 다음 차례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버리는 새로운 엘리트들을 고용한다.

 

만인의 동등한 기회, 가장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큰 보상을 받는다. 감히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출발점이 다를 경우 기회의 균등은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초기단계엔 능력주의도 대단히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전통과 연줄, 연공서열을 기초로 작동하던 사회나 기관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마침내 능력에 따른 임금수령이 가능하다. 마침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잠시 안정된 단계가 찾아오지만 결국 시스템은 정반대로 바뀌고 만다. 능력주의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사회진화론과의 유사성을 깨닫는 순간 매력을 잃는다.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 능력주의의 목표는 적자생존이다. 최고에게 상을 주고 나머지는 추려낸다. 사회진화론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나아가 이기적 유전자로 강조점을 옮겨갔던 것을 상기해보라. 개인이 중요하다. 노력하고 올바른 능력을 발휘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논리의 약점이 있다.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는 제일 잘 태어난 인간에게 살짝 더 이익을 얹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냥 두어도 어차피 그 사람은 성공했을 것이다. 다만 적자가 더 빨리 위로 올라갈수 있도록 우리가 자연을 약간 도와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점점 더 그들 스스로가 정의한 제한된 현실을 만들어내면서도 '자연의 승자'를 지원한다고 우긴다. 그런 다음 승자에게 체계적으로 이익을 주어 이들이 꼭대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이런 현실을 구조적으로 정당화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위 증거에 입각한 자연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다. 처음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 등장했고, 뒤를 이어 나머지 세상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이 등장했다. 그 결과 여성과 유색인은 건실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당연히 건실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물론 어차피 좋은 일자리를 주어도 감당하지 못할거라고 믿었다. 그런 시스템을 철저히 실현하면 정적인 사회를 낳는다. 정상에 있는 집단이 자기 자리와 특권을 다지고 아래서 절대 올라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하는 정적인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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