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황금기: 1945년-1973년
2차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오기전까지의 기간을 흔히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서유럽은 1인당 평균소득이 연간 4.1%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고, 미국은 2,5%를 기록했으며 서독은 5.0%를 달성해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황금기에 이루어낸 것은 높은 성장률만이 아니었다. 실업은 서유럽, 미굮, 일본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지다 시피하였다. 이들 국가들의 경제는 고용, 가격, 금융 등의 여러면에서 무척 안정적이었다. 황금기 동안 은행위기를 겪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2000년대 중반 몇년을 제외하면, 1975년 이후에는 매년 예외없이 5-35%의 나라들이 은행위기를 겪었다.
황금기를 이루어 낸 요인을 일부에서는 2차대전이 끝난후 전쟁중 군용으로 개발된 신기술들이 민간용도로 사용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금기에는 또 경제발전을 용이하게 만든 몇가지 주목할만한 변화가 국제경제체제에서 일어났다. 1944년 미국에서 회동한 2차대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금융시스템을 주도할 두 개의 중요한 기관을 설립했다. 이 두기관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더 잘 알려진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이다. IMF는 위기에 봉착한 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작용을 최소화 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프로젝트 대출을 위해 만들어졌다. 댐건설 등의 특정 프로젝트에 쓸 돈을 미리 빌려주고 민간부문 은행보다 더 긴 상환기간 혹은 더 낮은 이자율을 제공하게 때문에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나라들은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전후 경제체제 세 번째 버침목은 1947년 서명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였다. 경제발전 단계가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서 관세를 삭감하자 시장이 더 넓어지고 그 결과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생산성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 유럽에서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6개국이 모여 1951년 유럽석탄 철강공동체(ECSC)을 시작으로 로마조약을 통해 유럽경제공동체(EEC)룰 결성했다. 1973년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가 유럽공동체(EC)로 이름을 바꾼 이 공동체에 추가로 가입했다. 자본주의 황금기의 원인에 대해 가장 영향력있는 설명은 경제정책과 제도를 개혁한 혼합경제체제를 탄생시키고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대공항이후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고, 규제되지 않는 시장의 결함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부가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2차대전직후 유럽국가들은 철강, 철도, 은행, 에너지 등 주요산업분야의 사유기업들을 국유화 하거나 새로운 공기업 혹은 국영기업을 세웠다. 19세기말에 최초로 도입된 복지정책들도 광범위하게 강화 되었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처럼 일부국가에서는 기초서비스의 제공을 국가가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복지제도가 좋아지면서 사회계층간의 이동이 더 쉬워졌고, 이는 자본주의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대공항 교훈을 거울삼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의도적으로 경기 역행적 거시경제정책을 시행했다. 케인즈식 정책이라고 알려진 이 정책은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의 지출을 늘리고 중앙은행의 통화공급도 늘리는 반면, 경제상향곡선을 그리는 동안에는 지출과 통화공급을 줄이는 것이었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이 잠재적으로 위험하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금융규제도 강화되었다. 다수의 정부들이 선별적 산업정책을 채용해 무역보호와 보조금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특정 전략산업을 의도적으로 장려했다.
자본주의 황금기에는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했다. 아프리카 사하라이남 국가들의 독립은 좀 늦어 1957년 독립한 가나가 최초였고, 나미비아는 199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한 나라들은 대부분 식민시대에 강제로 시행해야 했던 자유시장, 자유무역정책을 거부했다. 그들이 따른 전략은 수입대체 산업화전략이라고 부르는데 수입하던 제조업 제품으로 대체했다. 세계은행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개발도상국들의 1인당 소득은 연간 3%씩 성장했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은 7- 8%의 1인당 연간소득 증가율을 기록해서 기적적인 성장을 이뤘다. 강도 높은 정부 개입에도 불구하고, 부자나라들과 개발도상국들 모두가 이전보다 훨씬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자본주의의 잠재력이 정부정책에 의해 제대로 규제되고, 자극될 때 극대화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과도기: 1973년- 1979년
대공황을 겪으며 금본위제가 거시경제운용의 융통성을 방해한다는 인식에서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다른 주요 화폐의 환율이 모두 미국 달러화와 고정되어 있고, 달러화는 금과 어느 때라도 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총생산량의 절반을 생산하고, 전세계적으로 항상 달러화가 부족하며, 모든 사람이 미국 물건을 사고 싶어하던 시절에는 충분히 타당한 가정이었다. 미국달러가 금이나 다름없이 믿을 수 있는 화폐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일단 깨닫고 나자, 달러화를 금으로 바꾸려는 수요가 늘어났고 이로 인해 미국의 금 보유고가 더욱 줄어들면서 달러화의 신용도도 더 떨어졌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종말을 고했다. 원유를 생산하는 석유수출국기구의 가격담합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원유가격이 4배나 치솟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성장률이 황금기와 비교해서는 줄었을지 모르지만, 1973년과 1980년사이에 2%를 기록한 연간 1인당 소득증가율은 2차대전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높았고, 심지어 신자유주의가 풍미한 향후 30년과 비교해도 약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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