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생물의 시간은 구조를 만들어낼 뿐 구조를 해체하지는 않는 시간이다. 쉽게 말해 소멸이 아니라, 계속 생명을 빚어내는게 생물시간이다. 노인은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세월을 , 죽음의 무게를 이야기할 따름이다. 죽음은 시간의 순전히 시간적인 것에만 느낄 수 있다. 내가 공식으로 파악하는 시간과 공간? 정의를 내릴 수 있고, 공식으로 포장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이게 다 무엇인가? 20년전만 하더라도 청운의 뜻을 품었건만, 하지 않고 남은 게 없도록 어떻게든 안간힘을 썼거늘. 지금이라도 시간이 허락만 해준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련마는.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버렸고, 남은 시간은 거의 없구나.

 

시간과 공간은 낯설기만 하다. 시간은 내적 감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니까 시간은 우리 자아와 우리가 처한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이다. 외적 감각으로서의 공간은 감각 가운데서 가장 감각적인 것이다.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감각으로 일어나는 일은 말해줄 게 거의 없다. 시간에 대해 품는 감정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대상이 없다. 상대방의 스스로 같은 시간의 문제에 부딪쳐 그 감정을 이야기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시간으로부터 어떤 좋은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기대의 시간, 곧 훌륭한 시간은 조바심만 키우게 만드는 적이 된다. 좋은 시절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시간을 빨리 보내지 못해 안달한다. 소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거나, 아예 시간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악한 시간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이를 테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시간은 어느 한 순간도 떨칠수 없이 소중하다. 반면에 창창한 미래를 앞둔 젊은이를 떠올려 보자. 그는 워낙 시간이 풍족한 나머지 시간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려 한다. 20대의 자신감으로 거칠게 없이 한동안 그렇게 살아가리라. 그러나 돌연 허망한 끝장을 맞으면 자신의 계획과 애매한 희망으로 잘못 산게 된다. 우리의 기대와 얼추 맞아 떨어지고, 통계와도 어울리는 연령대에 도달했다할지라도, 우리의 시간은 낯설기만 하다. 시계와 달력으로 나누고 정리하는 우리의 시간은 측량할 단위가 없는 것이다. 시간의 길이, 시간의 양은 상대적이다. 물리적 시간은 어차피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 보여주는 상대성은 그때마다 다르다. 시간은 시간으로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나날을 보내며 어떤 날은 지루했다고, 또 어떤 날은 순식간에 흘러버렸다. 어떤 순간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길고 위대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시계는 늘 균일한 리듬으로 똑딱일 따름이다. 나는 오늘 일력에서 한 장을 뜯어낸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하게 될 행동이다. 어쨋거나 시간의 행보는 늘 균일한 보폭을 보이지 않는다. 시간안에서 시간과 더불어 이 걸음을 걷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러면서 나는 비록 용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 인생을 성실하게 행진해 왔다고 자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가 목표도 모르고 숨가프게 달려오기만 했다는 걸 깨닫고, 다른 순간에 낙심한 채 자포자기하고 뒹굴 뿐이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공간이 우리를 둘렀싸고 있듯, 우리는 시간을 우리 자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없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