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나이를 먹는다는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 글에서 밝혀보려 한다. 이 주제를 두고 벌이는 내 성찰은 이른바 노인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물음은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시간을, 자신의 몸을, 사회를, 문명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하는 점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근접하게나마 충실하게 그리려는 노력은 성찰이라는 방법으로만 감당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그 쇠락을 두고 귀족같은 우아한 체념이라든가, 황혼의 지혜 혹은 말년의 만족이라는 말 따위로 치장해 위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미리부터 피할수 없다고 치욕스럽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게 늙어감이라고 둘러대는 일은 모순일 뿐이다.
이제 막 마흔 줄을 넘어서는 그런 늙어가는 사람도 있고, 예순을 넘긴 애매한 사람도 있다. 늙어감을 감지한 사람, 오랜 세월끝에 사회적으로 쓸쓸한 새벽에 익숙해졌으리라. 가슴과 배는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괴하다고 볼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목덜미까지 기른 짙은 검은색 머리와 수염은 아직 염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높은 옷깃위의 창백한 얼굴은 밀랍으로 빚은 마스크처럼 굳어 있으며, 동양풍의 이국적인 우울한 눈에는 광채가 사라졌다. 그저 짙푸른 다크서클에 묻혀 세상을 찬찬히 응시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저기 아버지 프루스트가 온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오로지 나이와 관련된 표현임을 안다. 남자의 자세가 꼿꼿하고 머리카락에 세치가 없음에도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인다고 말했으리라. 자신보다 훨씬 더 형편이 나빠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솜같이 생긴 수염을 기르고, 마치 구두에 납으로 만든 굽이라도 단 것처럼 걸음을 질질 끄는 사람.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입술은 죽음에 자신을 떠맡긴 사람의 기도를 읊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몸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이집트 신의 석상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피부 아래 점점이 찍힌 검버섯과 시퍼런 혈관이 눈에 뛴다. 수면 부족으로 말라 비틀어진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말을 걸어주는 사람의 얼굴, 음성, 몸매를 보고도 누군지 몰라 난처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모두가 변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다. 시간은 흐르며 스쳐 지나가고, 흩날려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 강한 바람에 날아가는 연기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도대체 시간이란게 뭔지 자문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이 둘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은 언제나 우리 시간, 살아낸 시간일 따름이다. 시간은 살아낸 혹은 주관적인 시간은 우리 모두의 가장 절박한 문제이다.
우리가 저마다 각자 전적으로 홀로 소유하는게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 손에 쥐어지는게 결코 아니다. 우리의 고통이자 희망인게 시간이다. 사라져 버리는 이야기? 시간은 흘러간다. 물처럼 줄기차게 흘러 되잡을수 없이 사라진다. 흘러감, 물 밀듯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짐은 사실 시간과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다. 흘러왔다 사라지는 것은 공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시간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공간 세계의 비유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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