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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화를 피하기 위한 사전 조건

우리는 격정의 근본 원인과 맞서 싸워야 한다. 화의 원인은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이를(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쉽게 믿어버려서는 안된다. 아무리 명백하고 확실해 보이는 것도 그 자리에서 바로 승인해서는 안된다. 더러는 거짓이 진실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판단에 앞서 반드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너무 쉽사리 믿어버리며,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화부터 낸다. 화는 가능한 한 유보해야 한다. (화는 곧 형벌이다) 형벌은 유예하면 나중에라도 집행할 수 있지만, 한 번 집행된 형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캐지 않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용서이다. 남의 말은 쉽사리 믿는 것 만큼 해악은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의혹을 품는 것보다 속아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낫기에 귀담아 듣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뒷받침 할 증거는 어떻게든 찾아질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담백함과 너그러운 판단이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짜증을 내서는 안된다.  하인의 행동이 굼뜬다든지, 물을 마시려는데 너무 뜨겁다든지, 침대가 어질러져 있다든지, 식탁을 아무렇게나 차렸다든지 등 이런 일에 화를 내는 것은 미친 짓이다. 미풍이 조금만 불어도 몸도 덜덜 떠는 사람은 몸이 약하고 아픈 사람이다. 쾌락이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병들게 하면, 그 무엇도 참을 수 없게 느껴진다.  그것은 그가 느끼는 고통이 커서가 아니고, 그가 어떤 것도 견디지 못할 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참을성 없고 절제할 줄 모르는 호사스러움 만큼 화를 부추기는 것은 없다. 영혼이 없는 물건에게 화를 내는 것은 말 못하는 짐승에게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모든 부당한 대우는 의도에서부터 출발한다. 칼이나 돌멩이가 우리에게 피해를 수는 있지만 부당한 대우를 할 수는 없다. 동물에게 화를 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듯, 아이들에게 혹은 분별력이 아이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다.

 

우리중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의 최대근원은 ‘나는 죄가 없어’ 혹은 '나는 아무짓도 안했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것 뿐이다. 우리가 불운으로 고통받는 것은 신의 잘못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의 운명 때문이다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것을 돌려받는 것이라 생각하자. 어떤 이들은 협박에 못이겨, 우리를 위해서 또 어떤 이들은 모르고 했을 수도 있다. 설사 일부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오로지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에서 그러지는 않았다. 농담하다가 실수로 말이 헛나올 수도 있다. 우리 자신도 공연히 의심을 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고, 적절하게 행동했는데 운수가 사나워서 잘못된 행동처럼 보일 때는 얼마나 많았으며, 우리가 처음에는 미워했지만 결국에는 좋아하게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에 대한 최고의 대책은 그것을 늦추는 것이다. 처음부터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사숙고 하기 위해 화의 유예를 요구하라.  화가 맹렬한 기세로 습격할 때는 타격이 크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를 성나게 하는 것 중에 일부는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말이고, 일부는 우리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