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덕은 악덕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는 안되며, 그 자체로 충분하다. 화가 이성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화가 아니다.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벌을 주기를 간절히 바래서가 아니라, 그것을 올바른 일로 생각하고 집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난 사람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이성은 경솔하고 폭력적인 충동들에게 결코 손내밀지 않을 것이다. 이성 그 자체만으로는 이 충동들을 통제할 수 없으며, 이들을 제압하려면 그만큼 강력한 다른 충동을 끌여들여야 한다. 이를테면 화를 두려움으로, 나태함을 화로, 두려움을 욕망으로 제압하는 식이다. 미덕이 악덕을 후원한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반론: 전쟁을 할 때 적과 맞닥뜨렸을 때 화가 필요하다. 적과 맞설 때에는 공격적인 행동이 잘 통제되어야 하고, 명령에 따라야 하고, 자유행동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파비우스가 상황을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벌지 않았다면, 어떻게 흔들리는 로마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파비우스가 화에 충실했다면, 로마는 지배권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원한과 복수의 욕망을 억누르고 유리한 기회에만 집중했다. 한니발을 이기기전에 먼저 자신의 화를 이겼다. 우리는 전투와 전쟁을 할 때 조차, 화가 유리한 수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는 조급함을 부르고, 적을 위험에 빠뜨리고자 하는 욕망은 경솔함을 불러들여 오히려 우리 자신을 위협에 빠뜨린다. 가장 믿을만한 지혜는 상황을 오랫동안 신중하게 살피고, 끝까지 자제심을 발휘하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
반론: 선한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강간 당해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선한 사람은 흔들리거나 주저함없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며, 선한 사람으로서 합당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이라면, 나는 그를 지킬 것이다. 만일 그가 이미 살해당했다면, 나는 복수 할 것이다. 애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는 애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약함에서 나온다. 이는 부모를 잃어버리거나, 개암나무 열매를 잃어버리거나,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이 우는 아이들의 행동과 같다. 친구들이나 가족의 편에서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나약하다는 증거이다. 부모와 자녀, 친구들, 그리고 동료 시민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충동에 휘둘리거나 격분하지 않고, 책임감을 인식하고, 심사숙고 하고, 그리고 기꺼이 앞으로 나선다. 모든 욕망(격정)이 모두 그렇듯이, 화는 너무나 성급하고 무모한 목표를 향해 황급히 돌진하다가 스스로 방해물이 된다.
반론: 화는 사람들에게 투지를 불어넣으므로 유익하다.
술에 만취해도 그렇다. 술은 사람을 공격적이고 대담하게 만든다. 사람이 미치면, 힘이 더 세어지므로 정신착란이나 광기 역시 힘을 내는데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죽음의 공포가 가장 무기력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전쟁에 나서게 하지 않던가? 화는 미덕을 거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미덕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는 것이다. 가장 화를 많이 내는 사람들은 아기들과 노인들, 그리고 환자들일 것이다. 어떤 쪽으로든 허약한 사람들이 불평을 하게 마련이니까.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실수 때문일진대, 선한 사람이 그들을 증오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길을 잃고 곁길로 가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사려 깊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치유의 대상인 사람에게 꾸짖되 화를 내서는 안된다. 벌을 주는 자가 화를 내는 것만큼 적절하지 않은 일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노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화가 나기 때문에 너를 매질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소크라테스 조차 자신을 화에 내맡길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누가 자유 자재로 자신의 격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은 자꾸 늘어나는 거미줄 같아서 이미 치유가 불가능하다. 그때 이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동기 따윈 필요 없으며, 악행 자체가 또 다른 악행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법의 태도가 화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법의 정신을 본받아야 하며, 법의 정신이란 화가 아니라,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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