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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이성과 화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으로 치부했던 격정이라는 무기는 오직 자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은 자신을 다루는 사람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그들에게 소유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소유한다. 이성은 어떤 일을 사전에 계획하거나, 그 일을 행할 때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이성은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한다고 판단하면,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그 목적을 이룬다. 이성은 자신을 대체할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에, 한번 결정한 것에 대해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화는 오래 버티는 단단함이 없으며 타오르는 격렬함에 편승할 뿐이다. 처음에는 거세지만 그 수명은 짧다. 격정은 쉽게 희미해지지만 이성은 균형을 잘 유지한다. 화는 어느 때는 필요 이상으로 내달리고, 어느 때는 가야 할 곳보다 미리 멈춘다. 그것은 충동에 휘둘리고 변덕스러우며, 증거 따위엔 귀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변호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며, 설사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할지라도 절대 권한을 놓지 않으려한다.

 

이성은 양쪽에 모두 말할 시간을 주고, 스스로의 판단에도 유예의 시간을 가지면서 진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하지만 화는 정신없이 서두른다. 그것은 자신이 반박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시작이 잘못되었더라도 재고하기보다는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더 명예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자기가 바라는 만큼 빠르게 남에게 화를 폭발시킬 수 없을 때,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화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화에서 자유로운 각자에게 합당한 벌을 내릴 때,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권력의 자리에서 생사를 결정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이런 점들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화난 자를 믿고, 칼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허약함과 과민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화를 통해 자신의 무기력함과 지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치 병들어 염증으로 뒤덮인 몸이 누구 살짝 스치기만 해도 신음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화는 어린아이 같다. 화난 사람의 말을 믿을 이유는 없다. 그들은 속으로는 잔뜩 겁을 먹었으면서 겉으로만 시끄럽게 떠들며 위협할 뿐이다. 좋은 사람과 위대한 사람, 그 두가지를 분리할 수는 없다. 품성이 좋은 사람이라면 위대하지 않을리 없다. 품성이 나쁜 사람은 무섭고 난폭하며 사나울지 모르지만 위대함은 결코 가질 수 없다. 화에는 설사 그것이 격렬하게 날뛰며 신들과 사람들을 깔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떠한 위대함도 없다. 만일 화가 위대한 정신을 낳는다고 누군가가 생각한다면, 차라리 사치가 위대한 정신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게 하라.

 

악덕의 미끄러운 비탈길은 쉽게 굴러내려갈 수 있다. 화가 판단의 과정을 거쳐 시작되는지 아니면 단순한 충동인지를 가늠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에 의해 발동되느냐, 혹은 우리 내면에서 진행되는 많은 일들이 그렇듯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몸 전체를 형성하고 나면 그 다음에 얼굴과 외양을 아름답게 해주는 요소가 더해진다. 그리고 몸이 다 갖춰진 후에 맨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강한 안색이 나온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에 대한 보복을 열망하는 것, 그리고 사람이 위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남에게 해를 끼친자는 보복을 당해야 한다는 두 가지 명제를 결합 시키는 것, 이중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단지 충동에 의해 일어날 수는 없다. 만일 화가 우리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화는 절대로 이성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현상들은 우리가 제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우리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믿을 때 우리를 뒤흔드는 최초의 정신적 충격은 이성과는 무관하다.

 

누군가가 미소를 지어 보이면 우리도 따라서 미소를 짓게 되는 것 처럼, 슬픔에 잠긴 문상객들 사이에 있으면 우리도 슬퍼진다. 다른 사람들이 결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도 덩달아 흥분을 느낀다. 이것들은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이것은 격정이 아니며 격정의 서곡 같은 것이다. 화는 단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세적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적극적인 추구이다. 이성의 동의 없이는 어떤 추구도 일어나지 않으며, 이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복수나 징벌을 해서는 안된다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마음의 움직임이라며, 이성을 가뿐히 뛰어넘어 홱 낚아채어 마구잡이로 휩쓸고 가는 것이 바로 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