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역사가들 사이에서 섬은 항상 매력적인 연구대상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이스터섬은 환경 역사가들이 가장 애호하는 사례이다. 이 섬은 가장 가까운 육지인 남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3500키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기원후 900년경부터 폴리네시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배를 제조하고, 항해술에도 능한 종족이었다. 이스터섬은 거주하기에 최적은 아니었지만, 2만-3만 명의 주민들이 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섬이었으며, 주민들은 11-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부족장 휘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은 야자나무가 자생하는 군락지였고, 야자나무는 카누를 만들기 적합했다. 25종들의 새들이 있었고, 주민들은 땅에서 재배하는 작물과 조류, 돌고래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설치류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이스터섬의 전성기는 1500년경이었다. 18세기초에 최초의 유럽인들이 이 섬에 상륙했을 때, 산에는 나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쿡선장이 1774년 기록한 바에 의하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키가 작고 바짝 마른 상태로 비참했다고 한다. 특이한 풍경은 거대한 수백개의 석상들이 주변에 세워져 있었다.
900년경 이미 최초의 이주자들이 도착한 직후부터 야자나무 숲에 대한 남벌이 시작되었고, 17세기에는 이미 대부분의 나무들은 사라졌다. 섬에 남은 마지막 나무를 베어버린 사람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있었는지 우리는 알길이 없다. 야자나무는 땔감으로 쓰이고, 건축재, 카누를 만드는데 쓰였다. 나무로 거대한 석상을 운반했다. 바람이 많은 섬에서 숲을 남벌함으로써 토양 침식으로 농업이 점점 어려워졌고 땔감도 없었다. 생존가능성이 축소되는 그런 상황에서 얼마남지 않은 소량의 자원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 섬에서 어떤 문화적 관행이, 그 자체가 목적으로 독립해버리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런 관행이 자포자기의 위험에도 결코 포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결정들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지각하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자신의 생존이 문제될 경우라도 문화적, 사회적, 감정적 그리고 상징적 요인들이 종종 자기보존의 본능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18-19세기 전투규범에 따르면 보병들은 원활하게 전사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 말없이 그리고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군인들이 대형을 이루어 전사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감지된 문제들이 극도로 실제적인 문제들로 변형될 수 있고, 결국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악화된다. 설마설마 하다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스터 섬의 문화는 잔인한 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섬에서 숲의 황폐화로, 그 원인인 자원갈등이 종국에는 섬에 남아있던 주민들끼리 약탈로 진행되었다. 외부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없이 몰락했던 이 섬의 사례는 인간들이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한 최종적인 자원 자체로 소비하는, 바로 그런 단계까지 이르러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872년 섬 에는 111명이 살고 있었다.
르완다에서의 학살은 투치족 집단이 처음에는 독일, 나중에는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후투족보다 우대 받았다는 생각에서 유래했다. 식민 당국은 당시 투치족에게 인종적으로 더 나은 등급을 매겼다. 그것은 독립이후까지 계속 작용했다. 내전상황은 한 나라의 주민들에게는 주기적 불안정과 극단적 위협을 의미한다. 그리고 적나라한 생존 경쟁과 더불어 그런 상황에 처한 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현실에서 감지된 위협을 축소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고,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 정확하게 분류하는 것이 필요했다. 르완다 민족 학살에서 내전은 단지 하나의 요인일 뿐이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자 불안정이 증대된 상황에서 내전과 일상적인 폭력이 개인의 폭력성을 현저하게 증가시킨 결과가 되었다. 살인행위의 사회적지각 차원에서 행위자들에게 의미있게 여겨지는 요소들 있다. 아주 높은 불안과 불안정 그리고 방향성 결핍이 존재하는데, 이런 감정들은 폭력을 통해 만족될수 있다. 다음은 경제적, 그리고 미래 전망적 차원에서 점점 더 궁핍해지는 상황 지각이 갈등 잠재력과 갈등 수준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현실적 위협과 그 행위자가 살인을 불가피하고 의미있도록 여기게 하는 살인의 정의의 관건 이다. 살인이 노동으로 정의되고, 정의에 맞춰 노동을 했을 뿐이다.
수단 서부 다이푸르지역에서 2003년에 7월에 민족학살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서구 시청자들에게는 아랍계 기마 기병대와 아프리카계 농부들 사이의 종족갈등으로 보인다. 정확히 들여다보면, 지역주민들에과 정부와의 전쟁임을 알수 있으며, 이 전쟁에서는 기후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이푸르는 인종적으로 관찰해 보면, 아랍계와 아프리카계 여러부족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아랍계는 대체적으로 유목민적인 생활방식과 관련되어 있고, 아프리카계는 농업적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그런데 토박이 아랍계들이 이주함으로써 사태가 복잡하게 되었고, 노예상인과 상아 무역상들이 다이푸르를 정복하고, 토박이 아랍인들과 섞이게 되었다. 외부에서 온 정복자들이지만 토착원주민들과 융합되어 오늘날까지 엘리트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잔위드 민병대는 1980년대 말 도적떼와 친정부적인 타격대 중간 정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군소아랍계 부족 구성원들, 파렴치범들 등으로 충원되고 있다.
다이푸르 사회는 이미 말했듯이 한편으로는 정착한 농민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가축을 키우는 유목민들 사이의 갈등은 이미 1970년대 이래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은 기후에 의해 조건 지어진 변화들이 갈등의 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점점 줄어드는 강우량- 지난 20년 동안 3분의 1이상이나 감소했다 - 때문에 북쪽지방은 이제 더 이상 목축업을 하기 어렵다는 걱정거리가 생겼고, 이 때문에 유목민들 조차 남부로 이동할 수 밖에 없는 이제야 비로소 그들 역시 완전한 유목민이 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갑자기 증가한 인구는 초지와 농지의 과다한 이용과 동시에, 기존의 잠재적인 갈등의 지속적인 고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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