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교육이란 현행 관습과 제도에 순응하고, 복종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다. 교육이란 순종과 복종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순응과 복종을 거부하려면 자기 스스로 생각하여 새로운 물음을 묻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교육은 바로 새로운 물음을 묻도록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교육은 끊임없는 변화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세게에서 겪을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재에 머무르면서 과거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현재에 머무르면서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은 현행 제도와 관습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풍토를 만들어 낸다. 교육은 이러한 풍조를 바꾸어야 한다. 교육은 무조건 순종과 복종이 아니라, 의문을 품고 물음을 묻는 탐구심을 고취해야 한다. 현행 제도에 만족하여 순응하고, 복종하는 태도는 노예가 지녀야 할 미덕일 따름이다. 현 대부분의 교육제도는 현제도와 습관에 순종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노예교육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399년까지 살았던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물음을 물을 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업적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크세노폰에 의해 전해질뿐이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신체를 지녔고, 충성스런 군인으로 참전했었다. 군인 시절 소크라테스는 하루종일 깊은 명상에 잠겨 있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으로 순간 막막해진다. 막막함이란 해질 무렵 어느 들녘에 홀로 서서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는 여행객이 겪을 수 있는 망설임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잘 살아야 한다'. 그게 답이다. '잘 사는 삶'이란 훌륭하게 올바르게 사는 삶이다. 함부로 사는 삶이 아니다. '잘 사는 삶'이란 올바른 행동으로 이루어지며, 지혜는 어떤 행동이 올바른 행동인가를 일러준다.
그렇다면 잘 사는 삶을 결정 짓는 것은 다름 아닌 지혜다. 오늘날 영혼은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넋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에서 영혼이 중요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 정도였다. 잘 사는 삶이란 자기 스스로 영혼을 잘 가꾸는 삶이다. 자기 영혼을 돌봄은 곧 자기 영혼이 건강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올바른 행위다. 역설은 문자 그대로 거의 모두에게 받아지는 판단을 뒤집는 진술이다. 악행이 무지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역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여전히 나쁜짓을 일삼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흡연을 멈출줄 모르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주지주의가 바탕이다. '덕은 곧 지식이다'가 주지주의의 모토이다. 주지주의는 절제, 올바름, 용기와 같은 다른 속성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면 지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얻는 확실한 방법을 '변증'이라고 믿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찬성과 반대 논변이 맞서는 과정이 변증이다. (논변: 옳고 그름을 밝힘) 대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가다듬어, 처음에 의도했던 내용을 분명히 밝힐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변증이란 지식을 가르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식을 자기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이 불완전하고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그것을 자꾸 교정해 주어 자기 스스로 진리를 께치도록 해야 한다. 변증이란 바로 자기 스스로 진리를 깨치는 기술이다. 진리를 자기 스스로 깨치려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생각이 잘못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하면서 듣는 이에게 어떤 관념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기보다는 듣는 이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 확실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바랐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이란 모자라는 존재이다. 이 모자라는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그러나 누구도 단숨에 혼자 지혜를 터득할 수는 없다.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통해 함께 지혜를 찾아 나서야 한다. 대화를 봉쇄함 으로써 지혜를 얻을 길이 사라지고 만다. 대화와 지혜가 사라진 삭막한 곳에서 독단이 판을 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죄목을 사실대로 변론한다. 그 변론이 '소크라테스 변론'이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를 가르치고 돈을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당초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저는 어느 누구에게 스승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제가 말하는 것과 제 일을 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면, 그가 젊든 나이가 많든, 저는 이를 거절한 적은 없습니다. 또 저는 돈을 받으면 대화하고, 못 받으면 안하는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이 그들이 내놓은 질문에 응답합니다. 물론 제가 대답히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가 듣길 원한다면 말입니다. ”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들은 자기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고,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부리는 말 속임수에 당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간교한 술책으로 자기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자를 언제나 곤경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그가 상대를 논박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던 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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