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물의 외적 모양, 특성만을 가지고 그 사물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사물에 대한 외적인 것외에 그 사물에 대한 각자가 갖는
정서적인 경험이 함께 따른다. 그 정서적인 감정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사물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힘들다. 각자의 경험에 의해 편견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실체가 없다. 우리가 '누구'라고 이야기할 때, 외형적인
특징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성질, 성향, 생각 등 추상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내 스스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나는 이렇고
저렇고 하는 평가를 받는다.
원시시대 거울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추상적인 것이
나를 결정짓는 요소들이라고 할 때 나는 '나'를 알 수가 없다. 사람마다 다르게 나를 평가할
것이다. 현재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람들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고, 또 상황에 따라
세월 따라 나는 변하게 된다. 그런 나는 실체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어떻다'라고 이야기한다. 내 스스로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 하는 나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스스로 인식하는 나의 의식의 표현이다. 그것은 나의 아주 일부다.
나는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물려받은 유전자와 살아가는
환경,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 결국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는
실체가 없다. 바람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구름 같은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회사, 가정, 지역집단, 동호인모임, 친구모임 등 무수한 집단들이
있다. 내가 어느 집단에 있느냐에 따라 최고로 인정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무시하는 집단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웃거리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
자신에 잘맞는 집단에 속해야 평안함을 느낀다. 인정받고, 즐거운 집단 속에 있어야 한다.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천대를 받으면서 모임에 기웃거리는 것은 나를 더욱 비참하고
외롭게 만든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은 신분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그 신분이
곧 돈이고 지위라고 생각한다. 이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다시 스스로 정의해 보아야 한다.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면에서 나의 신분을,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인정받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인정받지도
못할 것이고, 삶은 더욱 비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