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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어주는 여자(소노 아야코)

죽음 앞에서 발견하는 삶

 

노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자기 때문에 희생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희생시켜서는 당연히 안된다. 나이들어 혼자 살든 결혼을 하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만이 진정한 삶이라 생각이 든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 위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노아는 그저 그곳까지 밀려갔을 뿐이다. 뒤돌아 보면 우리들이 일생도 노아와 다름없다. 잘못된 삶이었다고 자신을 자책할 필요도 없고, 잘 살아온 것아 자기가 잘난 것이라 자만 해서도 안된다.  그 불가사의한 운명을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지위있는 사람이나, 더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 뭔가 얻을게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득이 아니라 독이다. 하긴 찾아갈 때마다 돈을 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금전이 개입되는 순간, 인간관계는 균형감각을 잃는다. 만일 돈을 목적으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관계가 좋다고 한들 그 사람을 반기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도덕을 믿지 않는다.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도덕은 반드시 자켜야 하지만, 음식을 훔쳐 배를 채우는 것 또한 도덕이다. 온갖 노력을 다해도 굶어죽게 되어가는 상황에서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한들 그게 부도덕하다. 할 수 있겠는가? 산다는 것은 일종의 권리이고 의무다. '사람을 쉽사리 죽여서는 안된다'는 인간적 관념은 결코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존재의 밑바탕을 지탱하고 있는 그 무엇에서 나온 것이다. 덕이란 자신의 존재를 영원속에 포함시키는 작업이다. 덕은 다른 이의 평가에 좌우되지 읺는다. 자식의 뒷바라지를 원한다면, 오늘부터 그 바람을 포기하라. 자식은 노후보험이 아니다.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계산적이고 어리석다. 세상에 부모의 사랑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부모도 인간인 이상 계산적인 면이 있고,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자식들을 자신의 그늘에 가두어 버리기도 한다. 흔히 사랑에는 댓가를 바라는 에로스적 사랑과 주기만 하는 아가페적 사랑이 있다. 그리고 부모라 해서 완전한 아가페적 사랑을 가질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식에게까지 보답을 바랄까? 인간은 결코 보답없는 호의를 보여줄 수 없는 존재인가? 이것은 현실이며 사실이다. 실로 이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계산적인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제재도 이러한 모습을 뒤바꿀 수 없다. 자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 싶다면 자식과의 관계를 다시한번 돌이켜 보기 바란다. 자식이 태어났을 때 어떤 기쁨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는지를 기억한다면, 지금의 모습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기껏 잘되어 봐야 빌려준 것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모든 거래의 진리다.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거래는 다르다. 만일 현실적인 문제로 기대를 하게된다면 일반 거래와 같다.

 

현명하게 살려면 공격범위와 수비범위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자식을 키울 때도 해당 되는 이야기다. 현명한 부모는 재산을 모두 쓰고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자식들이 의존적이고, 타산적 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자식과 부모는 가족이자 혈연인 동시에 쌍방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좀 형식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일단 자식이 서른살이 넘으면, 그 삶의 일정에 일체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그가 잘못된 길로 간다해도 당사자가 그 책임을 지고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야만 그 자식은 보다 현명해진다. 이 순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다.

 

노인과 젊은이는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세계관이 다르다. 따라서 연장자라는 이유로 또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서로 관계를 침범하고 질타 해서는 안된다. 각각의 친구에게 예의를 다하고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친구를 조심스러워 하면서 그들을 환영할 때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야 한다. 사실 노인들은 감사하는 일이 드물다. 그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노화현상이 아닐까?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며, 자식이나 배우자도 마참가지다. 그렇게 되지않을 때 못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상대가 자기를 보호해 주는 순간에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지만, 상대가 내 짐이 되는 순간 부부라도 미워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다면 감사의 마음에서라도 그를 감싸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가 인간의 요구에 따라 어떤 인간상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받아들여만 하는 의무인 것이다. 노력해야 하는 것은 결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즉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인간은 목적을 상실했을 때 죽음을 생각한다. 혹은 집착하는 무언가를 잃었을때, 그 공포로 인해 역시 죽음의 유혹에 빠져든다.

 

공포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죽음의 패턴이다. 한편 유독 죽음이 무겁고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타인과의 단절, 즉 누군가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살일 경우, 그 죽음은 상대에 대한 완벽한 거부와 다름없다. 노인들은 대다수 주어진 생활에서 좋은 점을 찾으려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하나도 생각지 못하고 나쁜 점만 사무친다. 하지만 불만없는 생활을 하는 노인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자리 보전만 하거나 시중 들어줄 피붙이 하나 없이 굶기를 밥먹듯 하는 노인들에 비한다면, 그들의 생활은 천국이라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냉대받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가출을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거나, 하릴 없이 근처를 배회하는 노인들도 있지 않은가? 나이들어 가면 갈수록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진다.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려고 한다. 살아온 환경이나 가치관이나 사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타인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다. 그저 들어주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 노인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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