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우리가 살게 될 사회를 생각해보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직결되는 신체기관들을 기계로 대체하고 생명을 연장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신체에 연결된 컴퓨터가 환자의 몸에서 기계로 대체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수시로 점검해 줄 것이다. 의료기관 수는 늘어날 것이고 어떤 의료기관에는 냉동을 희망하는 환자가 늘어날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시신을 냉동하면 미래에 다시 살아 날 수 있다고 광고하는 사람들을 규제하는 법이 없다. 언젠가 냉동된 사람의 미망인이 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혹은 재혼할 수 있는지 따위가 논의될 때 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현상에는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심각한 거부감이 깔려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문제에 직접 부딪히기 전에는 어떻게 하든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뒤 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결코 대중의 수준에서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컴퓨터로 대체 될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한 인간이 혼자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누구나 이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언젠가 일어날 일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어떤 환자가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난 뒤 한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이제 어쩌지? 그는 인공호흡장치와 24시간 간호에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말을 할 수도 손가락을 움직일수도 없었고, 정신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인식 할 수는 있었지만, 육체적으로는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의사는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환자의 분노와 좌절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상황을 되돌리기에 너무 늦었다.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고 또 성공했지만, 그는 환자의 비난과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오히려 사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담당의사에게 '이렇게 죽지 못해 살아있도록 그 동안 애써 주어 고맙다 '라고 말했다. 젊은 의사들이 겪는 고충은 그들은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은 배웠지만 삶의 정의 관한 토론이나 훈련을 해본 적은 없다. 뇌까지 죽은 환자로 취급 받으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지만 모든 상황을 인식하는 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고통을 느껴도 간호사에게 자기 의사를 표현 할 수 없다.
때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주어진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어떤 기계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환자의 표정보다는 기계의 수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가려운 곳이 있어도 긁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순간, 환자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발작 직전의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하루 5분 동안 짧은 대화를 통해 환자들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고 자신의 불편을 잘 견딜수 있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환자들이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식물인간처럼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곧 그들의 죽음을 돕는 것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저 바라다 볼 뿐이다. 불치병 진단을 받는 경우도 그러하다. 암이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비로소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악성 종양이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죽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중대한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완치율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은 여전히 불치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죽음에 맞닥뜨리기 전에 누구나 평상시에 습관적으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중 한 사람이 암 선고를 받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섬뜩하게 밀려온다. 어쩌면 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되건 아니면 조금 더 살 수 있게 되건,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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