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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의 두려움2

 

그 옛날 자신의 집에서 친지와 친구들에 둘러싸여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환자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가족들이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환자는 한결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가족이라면 진정제 대신 그가 좋아하는 와인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식을 몇 모금 넘길 수도 있고 그런 것이 비싼 영양제보다 훨씬 더 기운을 북돋아 줄 것이다죽어가는 환자가 있는 집에 아이들이 머무는 것이 허락되고 모든 대화, 두려움에서 소외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그들도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애도에 동참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아이들은 위안을 얻는다. 그런 경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해지는데도 도움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리는 자유, 인간과 과학에 대한 지식증가를 감안하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비극에 더 잘 대처하여야 옳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 인간이 집안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과학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죽음의 진실을 점점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인간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없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대사회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여러 면에서 더 외롭고 사무적, 기계적이며 비인간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앞 둔 환자들은 종종 익숙한 환경을 떠나 응급실로 내몰리기 때문에, 죽음은 더욱 외롭고 비인간적이 되었다.

 

한 번이라도 몹시 아파서 병원에 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응급실에 실려 갔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그런 상황에서 환자들은 참을 수 없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온갖 소음과 조명, 기계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상황 일수록 우리는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주고, 미소지어 주고,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시한부 환자는 종종 아무 권리도 의견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언제 어떤 병원에 입원할 것인지도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픈 사람에게도 자신의 감정과 소망과 의견이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는 바쁜 간호사와 인턴, 레지던트, 혈액을 체취 하거나 심전도를 체크하는 간호조무사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엑스레이실로 옮겨져서 자신의 상태에 관해 의사와 가족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환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을 받게 된다. 환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모든 결정이 그의 생각과 관계 없이 이루어진다. 환자가 혹시 반항이라도 하며 진정제를 놓을 것이고 그가 치료를 받을 체력이 있는지 한동안 관찰한 후 수술실이나 중환자실로 옮긴다. 환자는 이제 엄청난 걱정과 비용 지출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휴식과 품위를 달라고 울부짖어도 정맥주사, 수혈, 필요한 수술이 이루어진다.  환자는 단 한가지 질문이라도 던질 수 있는 단 일분의 시간을 원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건만, 그의 심장 동수와 맥박, 심전도, 심폐기능, 분비물이나 배설물등을 검사하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북적될 뿐 그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 모든 상황과 맞서 싸울 수도 있지만,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만약 그렇게 해서 생명을 건지고 나면 비로소 환자를 생각해 주기 시작한다환자의 입장을 진정으로 생각해 준다는 것이,  어쩌면 그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는 시간을 빼앗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이것이 이 모든 다급한 상황의 바탕에 깔려 있는 논리인 것 같다하지만 과연 그럴까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의 원인이 혹시 우리 자신의 방어심리는 아닐까?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병에 걸린 환자들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불안감을 억누르려는 우리 자신의 방어적인 태도는 아닐까?

 

각종 의료기기와 혈압에 집착하는 것이 다가올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우리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이 아닐까?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기계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나약함, 한계,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일깨워 주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얼굴보다 기계가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점점 더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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