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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훈육원칙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 아이는 저절로 교정된다. 부모가 맡아야 할 임무 중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 포함된다. 자연적 훈육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아이와의 친밀감을 철회시키는 것은 아이에게 최악의 공포를 자극하기 때문에 행동제어에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신체적 접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는 부모에게 몇 시간이고 붙어 있으려 한다. 이 모든 것은 진짜 반성이나 후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를 복구하려 노력하는 아이의 불안함일 뿐이라는 점이다. 분리라는 수단의 훈육에 길들여진 아이에게는 부모의 기대에 부합했을 때만 친밀감과 결합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해방도 자유도 경험할 수 없다. 겉보기에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지만 창발적인 에너지가 전혀 없어진다. 아이의 발달은 방해 받는다. 이런 식으로 아이와의 관계를 이용하면 아이의 애착 뇌는 우리를 배제하게 되고 관계에는 커다란 간극이 생기며, 사실상 이 아이가 애착 욕구를 다른 곳에서 찾게끔 유도하는 셈이다.

 

아이에게 불필요한 분리의 경험을 겪게 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방책이다. 오늘 강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내일 부모로서의 힘을 저버리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까. 애착은 우리의 단기적인 목표인 동시에 장기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비협조적인 유아든 반항하는 청소년이든 부모는 순종을 기대하기 전에, 정서적 친밀감을 회복하면서 먼저 아이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뜻을 온전히 전달하기 전까지 인간적 결합은 손상되지 않게 고스란히 보존돼야 한다. 밑바탕에 애착이 결핍된 상태에서 아이의 행동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이를 품안으로 모으는 일에 실패했다면 우리는 행동에 대한 집착을 거두어들이고, 관계형성에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고 능력을 모욕하는 사람들은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애착을 찾을 수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이를 가르치려다보면 다른 정당한 이유들도 아이에게는 이치에 닿지 않게 들린다. 아이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우리가 인내심을 갖기도 힘들다. 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분출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피해야 한다. 보호자가 희생물이 되었다는 느낌에 휘말리면 책임을 지고 있는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할 수가 없다. 이런 때엔 공격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아이의 좌절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나한테 화났구나. 정말 답답한가 보구나, 이건 너한테 맞지 않는 방법이었어이 말들은 비판적인 것이 아니라, 아이의 내부에 있는 좌절감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즉 방금 일어난 사건들이 결합을 깨뜨리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고 아이의 내부에 평온을 회복해야 한다.

 

훈육訓育이라는 어원의 의미 중에는 가르치다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부모로서 우리의 임무 중 많은 부분은 아이들이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런 인생의 교훈들은 생각을 교정한 결과라기보다는 순응의 결과이다. 순응은 무언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과 맞설 때마다 부질없음을 새기는 것이다. 순응적 과정이 순리대로 진행되면 교훈은 자동적으로 습득된다. 이는 부모들만의 작업이 아니다. 순응적 과정은 무수한 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 아이들을 훈육하는 임무를 완수한다. 아이 스스로 효과가 없는 일련의 행동을 그만두고, 한계와 제한을 받아들이게끔 만들기도 하고, 부질없는 요구를 포기하도록 한다. 오로지 그런 과정을 통했을 때에만 아이는 바꿀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순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바꿀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면, 이는 현실에서 도피할 방도를 찾게 되고 따라서 순응적 과정은 좌절된다. 사태를 바꾸려는 것은 헛된 시도라는 사실을 아이가 받아들인 후에 이유를 설명해도 늦지 않다. 순응의 다음 단계는 아이의 좌절감을 함께 느끼고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다. 부질없음의 벽을 세운 뒤에는 아이가 좌절감 아래에 고인 눈물을 닦도록 도와줄 차례이다. 순응은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때로는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의 순응성 부족에 적응해야 할 필요도 있다. 아이에게 자연적 훈육을 촉진하는 과정이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앞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에서 후퇴해야 한다.

 

다음 단계인 사고적 전환은 행동에서 의도로 초점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의도는 심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 의도는 충분하지 못하며 행동만이 수용할만하고 칭찬할 만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의도는 가치의 씨앗이고 책임감의 전조이다. 아이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우리에게 순응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 대해서는 일단 품안으로 모으고, 그 다음에 어머니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의도를 준비시켜야 한다. 어느 정도 자란 아이들에게서 좋은 의도를 끌어내는 것은 아이들과 우리의 가치를 나누거나 가치의 씨앗을 함께 찾는 일이다.

 

좋은 의도를 끌어내는 것이 저절로 바람직한 행동을 낳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조차도 좋은 의도가 항상 행동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시작할 지점이 필요하고, 바른 방향을 겨냥하는 것이 바로 출발점이다. 좋은 의도를 끌어내는 것은 안전하고 매우 효과적인 부모 역할의 실무이다. 우리가 실패의 아픔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금방 포기하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의도를 조심스럽게 키워서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때리지마, 방해하지마, 그만둬, 버릇없이 굴지마, 정신 좀 차려, 바보처럼 굴지마’.. 등과 같은 말로 충동적인 행동을 제지시키려는 것은 화물열차 앞에 서서 멈추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아이의 행동이 본능과 감정에 휩쓸려 있을 때는 맞서거나 소리를 질러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이들은 이미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내적명령을 따른다. 두려워하는 아이는 피하라는 본능적 명령을 따른다. 불안한 아이는 매달리고 붙어있으라고 강요당한다. 좌절감을 느끼는 아이는 대개 많은 요구를 하거나 울거나 공격하게끔유도된다. 창피당한 아이는 숨거나 감추라는 명령을 받는다. 반항적인 아이는 다른 사람의 의지를 거스른다. 충동적인 아이는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뇌는 활발하게 작동하는 감정과 본능에 따라, 아이를 움직이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충동을 제어하는 대안은 있다. 자기제어의 비결은 우리가 한 때 생각했던 것처럼 자제력에 있는 게 아니라 뒤섞인 감정에 있다. 행동이 충동보다는 의도에 근거할 때 새로운 명령을 수행한다. 이때의 행동은 충동적으로 내몰리지 않기 때문에 훨씬 다루기가 쉽다. 우리의 할 일은 아이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반되는 느낌과 생각을 불러일으켜 아이의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 안에 있는 이런 면과 저런 면을 동시에 보는 일에서 아이보다 앞선다. 우리는 상반되는 요소들을 유도해내고 아이 안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훈육은 아이들을 밀어내지 않고 우리 쪽으로 끌어당긴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한다. 마치 아이들이 스스로 심리적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아이의 본능과 감정에 깊이 뿌리박힌 행동을 단번에 없애거나 잘라낼 수는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충동은 늘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는 부끄러움, 불안, 질투, 소유, 공포, 좌절, 자책감, 저항의지, 걱정, 분노와 관련된 충동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다.

 

자연이 제공하는 해답은 무언가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충동을 저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의식의 영역에 더하는 것이다. 자제심이 없는 아이들은 자기 행동의 영향을 인식하거나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런 아이들은 행동하게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하거나 자신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제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다. 자신의 관점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아이들을 무신경하고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이며 품위가 없고, 인정머리가 없다고까지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 아이들의 행위에 격분하게 되고 아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나도 많이 반성하게 되는 쉽지 않은 부분이다.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좌절감을 일으키며 더 심하게는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아이와의 관계를 유지하게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요구와 기대를 던져버려야 한다. 미성숙한 아이들을 다루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미리 바람직한 행동에 대한 구체적 지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호를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사이좋게 지낼 능력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이들에게 누군가가 아이들의 행동을 조절하고 구성할 필요가 있다. 아기는 이렇게 안아야 한다. 그렇게 한 번 해봐, 고양이는 이렇게 쓰다듬어야 한다. 이제 아빠가 말할 차례구나, 지금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야 해성공적으로 행동의 구체적 지시를 제공하려면 아이의 본보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기본에서 출발한다. 관계 안에서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먼저 아이를 품안으로 모아야 한다. 물론 아이의 행동을 지시하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에 대한 아이의 애착정도에 따라 발휘된다.

 

모방하고 따라하려는 본능을 일으킬 정도의 애착이면 된다. 성공적인 지도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는 아이가 따라갈 수 있는 방식으로 주어야 한다. 부정적인 명령어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실제적으로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바람직한 행동을 얻기 위해 지시 언어의 한 예로 아이에게 스키 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균형 잡아, 넘어지지마, 속도를 줄여 잘 조정해야지 방향을 꺾어이런 것들은 다 옳은 말이지만 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스키로 알파벳 A를 만드는 법을 보여주고 아이가 따라할 수 있게 신호를 보낸다. ‘ A를 만들어 오른쪽 무릎을 낮추어 무릎에 손을 대이런 신호의 결과 균형, 정지, 회전을 할 줄 알게 된다. 초보라도 스키를 탈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아이가 그런 행동들이 몸에 베여 마침내 자연적으로 나올 때까지 신호를 따르는 것뿐이다.

 

훈육을 하려는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의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때 목적은 나쁜 행동을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는 경험을 바꾸는 것이다. 훈육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 위해 부모는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1. 다른 훈육양식의 무익함을 느끼고 효과가 없는 방법을 포기하는 능력

2. 아이의 환경 속에서 문제행동을 유발하는 요인들에 대한 통찰력

3. 이런 해로운 요소들을 바꾸거나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잔소리가 무익한 것을 감지할 수 있고, 부모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으려면 부모는 순응성이 매우 뛰어나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부모는 아이를 바꾸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해결책은 통찰력이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결정한다. 아이가 제멋대로 군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행동을 고치려는 데에만 편협하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단지 충동에 의해 흥분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애초에 그런 충동을 유발한 상황을 바꾸려 할 것이다. 아이가 짜증을 내거나 누군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만을 본다면 공격성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 반대로 아이가 좌절감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아이를 좌절감에 빠뜨린 상황을 바꾸려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