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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슾픔 (알랭 드 보통)

로켓 과학자 외

로켓 과학자

위성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 현재 과학계의 삶이 개인적 욕구의 제한 또는 말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 영광의 기회는 없었다. 역사적인 위성발사에서 전기가 기록되거나 일반인이 기억할만한 이름으로 남을 전망이 없었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도 심지어 어떤 상업적 또는 학술적 조직도 명예를 독차지할 수 없는 집단적 기획이었다. 천재들이 관측소나 작업장에서 일로 매진하여 과학사의 방향을 바꾸던 시절은 지나갔다. 우리는 천체물리학자와 항공 엔지니어들이 어느 한 사람을 우리 시대의 갈릴레오로 띄우려는 미디어의 시도에 저항하면서, 공동실험실에서 작은 수수께끼를 10년 동안 함께 공략하는 소박한 시대에 들어섰다. 과학자 한 사람이 고온에서 티타늄의 속성을 살피거나 점화시점에 수소가 보이는 반응을 살피는 일에 한 평생을 바칠 수도 있다. 천재들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영웅적 화려함과 자긍심은 물론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대를 졸업하고 집단적 노력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전보다 더 나아지고 더 편해진 면도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인디언들의 사고 구도에서는 인간이 세계에 직접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세계에 영향을 주려면 세계의 여러 기능을 담당하는 영들에게 요청해야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원해야 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 맥(짐승이름)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바람은 하늘에 숨어 있는 거대한 맥이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맥은 커다란 종려나무 잎을 흔들어 바람을 만든다. 지금 정글 가장 자리의 격납고에서 연료를 넣고 짐을 싣는데 몰두한 과학자들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도저히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혼합탱크 유체역학의 수량분석이나 폴리머 첨가제의 드래그 감소가 터뷸런트 파이프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주를 그들의 죄나 미덕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기계, 이성으로 분해할 수 있고 주문呪文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론으로 예측을 할 수 있는 감정 없는 기계장치로 여긴다.

 

자연은 19세기에 걸쳐 숭고한 느낌을 자아내는 주된 촉매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기술적 숭고함의 시대로 깊이 들어왔다. 숲이나 빙산이 아니라 슈퍼컴퓨터, 로켓, 입자 가속기가 가장 강렬한 경외감을 자아내는 시대인 것이다. 우리는 거의 우리 자신에게만 놀라고 있다. 반면 자연은 피를 흘리고 죽어가면서 우리 문 앞에 당도한 예전의 원수처럼, 우려와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회로판에는 존중심을 느끼고 빙하에는 동정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삶의 많은 부분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면의 혹독함, 중력, 우울에 계속 시달리며 이어져나갈 것이다. 사실 동굴에 살던 우리 조상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우리 몸은 쇠약해질 것이고 우리의 계획은 뜻한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잔인성, 욕정, 어리석음에 시달릴 것이다. 과학 이전의 시대에는 아무리 부족한 것이 많다 하더라도 어쨌든 인간이 이룬 모든 성취는 우주의 장대함에 비추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계장치에서는 그들보다 축복을 받았을지 몰라도 세계관에서는 그들보다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똑똑하고 정확하고 맹목적이고 도덕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엘리트 들 외에는 달리 딱히 숭배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선망, 불안, 오만의 느낌들과 씨름을 하게 되었다.

 

화가

완전히 마무리된 뒤 미술관에 걸린 반들거리는 그림들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림 한 점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엄청나게 다양하고 지저분한 장비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을 하다가 깜빡 잊고 끼니를 거르는 것은 화가에게 드문 일이 아니다. 일을 할 때 그는 사각형의 캔버스를 움직이는 하나의 정신, 하나의 손에 지나지 않는다. 물감을 섞고 그 색깔을 세상과 비교하여 확인하고, 그것을 격자의 할당된 장소에 정착시키는 작업을 하다보면 과거와 미래는 사라진다. 화가는 사물의 겉모습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밀의 색깔이 잘못 표현되었다거나 하늘의 두 조각 사이에 불편한 단층선이 있으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걱정은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작업방식은 사실 20여 년간의 연구결실이다. 강한 바람이 불 때 밀의 움직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색깔을 능숙하게 다루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린다.

 

5년간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에 맞추어 쓴 에세이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된다. “나는 어른이 되어 거의 모든 시간에 물리적 세계를 관찰하는 일을 해왔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은 해를 볼 때와 해에서 고개를 돌릴 때 일어나는 빛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거대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집단적인 기획들 속에서 희석되고, 그러다 보면 작년에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진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이고 도대체 무엇이 된 것인지 궁금해 하다가, 결국 퇴직 기념파티 같은 분위기에 젖어 우리의 사라진 에너지를 바라보게 된다. 화가는 이젤 앞에 서면 전혀 오만하다는 느낌 없이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순간에 그의 동료는 동네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술친구들이 아니다.”

 

훌륭한 그림이라면 자동적으로 모든 논평을 부적절하게 만들 것이라고 한다. 그 그림이 우리의 논리적 기능보다는 우리 감각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화가는 그림과 음악이 관념의 감각적 표현에 매진하는 장르라는 헤겔의 정의를 인용한다. 헤겔은 우리에게 그런 감각적인 예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많은 중요한 진실이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재료로 만들어졌을 때에만, 우리 의식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어떤 것을 깨우치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바람 없는 뜨거운 여름 오후 떡갈나무의 서늘한 그림자, 초가을 잎의 황금빛을 띤 갈색, 기차에서 스쳐가며 본 묵직한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윤곽으로만 서 있는 헐벗은 나무의 어떤 금욕적 슬픔, 동시에 그림은 우리의 정신의 잊고 있던 측면들과 신비하게 결합될 수 있다. 우리는 나무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갈망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하고, 여름 하늘의 아지랑이 색조에서 사춘기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화랑에서 판매된 그림은 많지 않다. 전국지에 리뷰가 실리지도 않는다.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유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림을 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림은 현대의 세속적인 성상처럼 자신의 주위에 자기장을 만들어 자신을 보는 사람에게 어떤 태도와 행동규범을 제시한다. 전시회가 끝나면 화가는 변변치 못한 배관공의 1년 수입 정도를 벌어들인다. 평소의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본성의 비실용적 측면을 보는듯하다. 화가는 자신의 운에 기가 죽지 않는다. 화가는 물을 그려보고 싶기 때문에 다시 강의 한 지류를 보러 갈 것이다. 둑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분위기와 빛 속에서 강을 그릴 것이다. ‘물을 본 적이 있어요.’ 화가가 묻는다. ‘제대로 본 적이 있냐는 거죠?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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