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 국왕이라고 하면 절대 권력을 지니고 나라의 부를 독점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세 유럽의 왕들은 재정적으로는 상당히 궁핍한 상태였다. 당시 유럽 국가에서는 나라 전체가 왕의 영토가
아니었다. 귀족 제후들이 각각의 관할지를 가지고 있어서 왕은 그것을 총괄하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왕이
직접 관할하는 영토는 그리 넓지 않았다. 귀족과 제후들은 세금을 면제 받았으니 왕의 수입은 직접 관할하는
영토에서 들어오는 세금과 관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끊임없이 전쟁에 몰두해 있었다. 전쟁
비용 대부분은 국왕이 직접 부담해야 했고, 재정상태는 빨간불이었다. 유럽의 국왕들은 유럽 곳곳에서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두 번에 걸쳐 파산선언을 했다. 상인들에게 빌린 돈을 못갚는다고 선언한 것 뿐이다.
오늘날 디폴트인 셈이다. 이 디폴트로 당시 스페인령이자 네덜란드 최대 상업 도시인 엔트위프의 상인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물론 국왕도 큰 타격을 입었다. 디폴틀를 선언한 쪽은 빚을 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돈을 빌린다 해도 상당히 나쁜 조건으로 돈을 빌려야 하고, 담보 등의 형태로 자산을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현실은 국왕도 마찬가지다. 프랑스혁명 역시 왕의 디폴트선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는 로마제국의 피를 이어받은 중세 유럽 대국이다. 루이 14세 시절에는 강력한 왕정국가였다. 역대
프랑스 국왕은 다른 유럽국가의 국왕과 마찬가지로 몇차례 디폴트 선언을 했다. 프랑스혁명 전에는‘타이유’
라는 이중과세를 매기고 있었다. 타이유는 토지세와 재산세의 성격을 지녔으며 영국과의 백년전쟁 때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전쟁특별세였지만, 전쟁이 끝나도 폐지되지 않고 프랑스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다만
귀족, 사제, 관료 등은 타이유를 면제 받았다. 면세 특권을 누린 귀족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농민들이나
서민들은 더욱 궁핍해지는 상황에 처해졌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3%의 귀족이 90%의 부를 차지했다.
또한 세금을 징수하는 청부인의 부정도 끊이지 않았다. 청부인의 부정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프랑스
국가 재정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졌다. 당시의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몰두했고
이로 인해 재정은 더욱 압박 받았다.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16세도 엄청난 빚을 안고 있었다. 전 국왕의 7년
전쟁, 미국독립전쟁 지원 등으로 빚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신용 없는 프랑스에 대한 이자는 높았고, 국가
세수입의 반 이상을 이자로 지급했다. 루이16세는 국가제정을 정비하기 위해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를
재무총감으로 발탁하였다. 당시 스위스는 프랑스의 매우 중요한 돈줄이었다. 루이 16세는 스위스 금융계의
넓은 인맥을 보유하던 자크 네케르를 뽑아서 스위스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자크
네케르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네케르는 국가 재정을 정비하기 위해 먼저 세금을 징수하는 청부인제도 개혁을 착수하였다. 당시 청부인은
'세금징수권'과 더불어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도 하였다. 국가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받고
싶어 했다. 때문에 청부인은 국민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전에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세금징수권을 국가로부터 부여 받았다. 당연히 청부인은 국가에 돈을 빌려줄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이 넉넉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청부인이 되면 국가가 인정한 세금징수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즉 세금징수권 청부인제도는 유복한 사람이 세금징수권을 얻어 더욱
살림이 넉넉해지고, 민중은 더욱 궁핍해지는 치명적인 악순환을 가져오는 시스템이었다.
네케르는 세금징수 청부인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청부인이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 자체를 금지
시켰다. 그리고 청부인에 대해 엄격한 감시제도를 만들어 부정행위를 막았다. 이런 개혁에 프랑스의 귀족이나
특권계급은 맹렬히 반발하였다. 세금징수 청부인 제도는 그들의 기득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팜플릿을
만들어가며 네케르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소책자와 같은 얇은 팜플릿이 다양하게 발행
되어 시민들에게 폭넓게 읽혔다. 네케르는 개신교 신자였기에 가톨릭 신자가 많은 프랑스에서 공격받기 더욱
쉬웠다.
‘스위스 유복한 은행가가 프랑스 부를 뺏어간다’는 내용의 팜플릿이 마구 쏟아지자 네케르는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프랑스 국가의 세입과 지출 내역을 시민들에게 공표한 것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국가재정은 비밀의 영역이었다. 오늘날이야 자국민이나 세계를 향해 공표되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
지지만, 근대 이전의 국가에서는 재정 영역을 공표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네케르로서는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리라. 그러나 재정내역을 공표하자 프랑스 시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국가세입중 왕가 자체 지출이 10%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농작물의 흉작등으로 인해 서민들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네케르의 회계 공표로 왕가의 낭비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드러나자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반면 네케르는 이 공표 덕에 프랑스 시민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었다. '이토록 구체적인 숫자를
밝힌다는 것은 네케르가 청렴하다'는 증거다. '네케르는 강한 의지가 있다'며 영웅이 되었다. 결국 루이16세는
네케르를 파면시켰다. 그러나 네케르는 프랑스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재무통감으로 복직하였다.
하지만 다시 루이16세가 네케르를 파면시키자 파리 시민들은 격노하며 마침내 봉기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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