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욕망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며 감추고 싶어한다. 인간은 욕망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욕망에 구속
되어서는 안된다. 무엇을 좋다, 나쁘다로 평가하는 분별심이 우리를 그 대상에 구속하게 한다. 그 이분법을 타파해야
한다. 욕망이란 에너지다. 욕망으로 무엇을 소유하려 한다.
동의보감에서 그 욕망을 정精 기氣, 신神으로 설명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작동한다. 정精은
질료로서 신장에서 생성되며 몸속 액체로 된 모든 것이다. 이 질료를 이동시키는 것이 기氣이며 엔진이다. 폐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이 몸속에서 氣를 순환시킨다. 정,기精, 氣는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에너지다. 몸이 그 목적을
위해 에너지 精, 氣를 사용한다.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신神이며, 심장에서 만들어진다.
이 정기신精, 氣, 神으로 욕망의 작동 원리가 설명된다. 神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神은 몸의 작동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이것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우리는 소홀히 대하며 무시한다. 神은 내 삶의 방향이다.
자연과학 측면에서 생명은 물질과 정신의 집합이다. 삶의 방향은 정신으로 정해지며, 욕망의 에너지로 나아간다.
현실적 욕망의 대부분은 식욕과 성욕이다. 이것이 일상적 활동의 방향이다. 식욕은 내 몸의 내부 작용이지만,
성욕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식욕이야 대충 때울 수도 있겠지만, 성욕은 상대가 필요하고 혼자 해결하기 어려우니
사고가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식욕은 생존을 위함이며, 성욕은 번식을 위함이다.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욕망의
중심이다.
먹었으니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그 에너지로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한다. 그 무엇인가가 번식이다. 아이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세상을 배우는 일에 사용한다. 성인이 되면 그 에너지를 발산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식욕으로 에너지를
흡수하고. 성욕으로 번식 행위롤 통해 그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활동 전부다. 번식이란 내
몸 속 에너지로 무엇인가를 상대로 관계 맺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사고를
치게 된다.
현대인들은 옛날에 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여 오로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등의 양생활동에 주력하여
생명을 늘이기 위해 애쓴다. 이것은 생명활동에 반하는 삶이다. 번식행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他者와 접촉
하여야 한다. 타자와 접촉하여 무엇을 변형시키고, 생산하는 행위다. 타자란 내가 아닌 모든 물질, 인간, 관념 등 나
이외에 모든 것이다. 타자와 접촉하여 그에 따라 나를 또다르게 변형시킨다. 이것이 올바른 생명활동이다. 이러한
생명활동으로 인간이 탄생했고,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거쳐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우리는 욕망을 스스로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 사고방식이다. 욕망은 우리 의지대로,
마음 한번 먹는다고, 그런 식으로 통제될 수 없는 카오스로 보아야 한다. 환경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며 작동하여 번식
하고, 변형될 뿐이다. 원초적으로 모든 사람은 어떤 것은 모자라고 또 어떤 것은 넘친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적절
하게 가질 수 없다. 이것은 평등하다.
우리는 욕망을 숨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남자도 여자도 그런 욕망을 숨기고 살아간다. 자신의 욕망을 성찰
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에 특정 시점에 특정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들을 모든 인류에게 적용돤다고 우리는 착각한다.
그것을 진리라 강요하며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욕망과 내 몸을 내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항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이고, 저것이고 싶으면 이것이다.
지금은 자본주의로 인해 이제는 물질에 대한 탐욕이 욕망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고 있다. 서유기 등장 인물들로 현대인
들을 분류해 볼 수 있다. 손오공은 수련을 통해 모든 능력을 갖추었고 물질적 탐욕도 없다. 다만 그 넘쳐나는 에너지를
분노로 폭력을 행사할 뿐이다. 분노조절장애로 정신적으로 구속된 진瞋의 화신이다. 그렇게 수행하여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 에너지를 사용할 곳이 없다. 폭력밖에 그 에너지를 해소할 곳이 없다. 저팔계는 식욕, 성욕의 무한증식
으로 형성된 탐貪의 화신이다. 사오정은 자기가 누군지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음, 치痴의 대표적
물상이다.
이처럼 탐,진,치貪,瞋,痴로 인해 우리 욕망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 욕망 자체로만 끝나지 않고 접속 되어 스토리로
이어져야 한다. 무엇이 무조건 욕망의 대상일 뿐이라면 폭력이다. 물질적 풍족함과 엄청난 힘을 장착한 욕망은 어디로
갈까?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오정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동물 아닐까?
로고스 logos라고 진리의 말씀으로만 생각할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것이 로고스적인 행위다. 지월지指月指.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아야 한다. 무슨 행동을 하든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찰하여 그래서 욕망이 제대로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당장
그 방향을 찾지 못해도 계속해서 믈으면, 욕망은 올바른 방향을 찾아간다.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했고, 로고스가 나를
형성한다. 그리고 로고스는 질문으로 생명력을 갖는다.
쾌락은 즐거움이지만 쾌락의 극極은 괴로움이 된다. 모든 연예인들의 성공 뒤에는 외로운 삶이 있고, 우울증이 있다.
욕망의 현장과 대면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화폐- 소비의 사이클이 반복 되며, 우리는 그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사이클에서 정기精氣를 소모하여 고갈시키는 삶은 고통이고 공허하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고苦의 윤회輪廻가 이것이다.
욕망은 발산과 수렴, 생성과 소멸의 연속적인 파도타기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탐,진,치貪,瞋,痴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을 끌어안고 끊임없는 질문으로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때, 비로소 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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