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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

타인으로부터 기쁨이 온다

사적 이익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공공성을 이야기하면 껄끄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저자는 그런 사회에서는 공동체는 물론이고,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미국 사회가 돈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경쟁 때문에 공동체성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우리 한국이야말로 돈과 계습 상승에 대한 끝없는 욕구로 인해, 공동체, 공유, 공감, 공익...이 제대로 굴러다니지 못하는 사회 아닌가? 한국사회의 가장 이 하면서도 어두운 단면중 하나는 바로 정치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정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개인에게 큰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중앙정치의 온갖 미사여구에는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삶과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지역, 마음정치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정치가 대화와 합의가 아닌 분리와 배척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되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려움을 겪을수밖에 없고 오히려 개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행동은 '알지 못하는 타인과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깊게 다가온다.

 

'많은 것들이 우리가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는 어떤 것은 사라지고 다른 어떤 것은 고통스럽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무언가는 산산이 부서지고 쇠약해지고 지쳐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희미한 무언가가 돌무더기 속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바츨라프 하벨 : 추도문중에서) 

 

나는 세상을 구하는 길은 '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가짜관계,  즉 사람이 아닌 인터넷과 SNS를 통한 관계에 관심이 많다. 모든 것들이 급격하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인터넷 환경에서 당장은 영원할 같은 책들도 올라오자마자 과거의 정보가 되어버린다.  나는 구술문화를 되살리는 일이 나의 역할이라고 종종 생각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함께 대화하는 것이 함께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글을 읽고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엘리트 계층이 사상을 주도하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일반 대중들은 더 이상 사상을 만들고 창조하는 일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민중의 힘을 믿는 우리 같은 평민들에게 또다른 기회가 생겼다. 물론 인터넷 때문에 사람간의 관계가 단절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이 담당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고, 우리는 이를 오히려 새로운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미국 민주주의는 단순한 도덕으로 규정되어 있다. 미국 시민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며 신뢰를 구축하고, 자신과 가족, 친구와 이웃은 물론 조국과 서로를 위해, 그리고 한번도 만난적 없고 앞으로도 결코 만날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 글렌 스미스‘  ’ 왜 민주주의는 공적 이어야 하는가‘ 중에서)

 

먼저 왔기 때문에 자리에 대한 권리를 가졌고 자신이 밀려났다는 사실이 첨을수 없다. 차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따라서 격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우리 문화다.  ‘ 각자 능력껏 살아남아라’  '어느 누구보다 먼저 쟁취하라' 라는 구호 아래 주차자리 확보, 우수한 성적받기, 돈 많이 벌기, 막강한 권력쥐기 등 우리는 모든 것을 두고 경쟁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 기후변화, 환경파괴, 빈곤, 전쟁 등 인간의 삶을 처참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굳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서로를 보살피고 협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그러한 이기심을 극복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종이라고 단정한다. 이를테면 적자생존이 그렇다. 삶이란 결국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며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 왔다. 하지만 재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보살폈다. 이러한 현상은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도, 대공황과 지진, 눈폭풍을 겪는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레베카 솔닛은 ‘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것은 두려움과 불안보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대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솔닛은 이 공동체 능력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극히 중요한 요소임에도 이제껏 관습적 사회때문에 묻혀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지진을 겪은 어느 젊은 여성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기쁨부터 슬픔까지 인간이 모든 감정을 경험하고 또 경험했습니다.  그 감정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보상해주었습니다.  천년의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모두가 당신의 친구였고 당신도 모두의 친구였습니다... 지진과 화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따뜻한 마음과 기쁨이었습니다. ’

 

하버드대 요차이 벤클러교수는 ‘펭긴과 리바이든’에 따르면 인구의 약30%는 자신이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인 처럼 행동한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절반은 매우 협력적으로 행동한다.  벤클러 교수는 이기적이거나 협력적이 될 가능성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반반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이 친절해야 친절해지고, 상대방이 이기적이면 자신도 이기적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협력자, 다시 말해서 이타주의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공공선에 기여하기 위해 자유의지에 따라 협력하고 협동한다. 근본적으로 협력의 문제는 문화적 규범과 제도에 달려있다. 그러면 이 문화적 규범과 제도가 타인을 배려하거나 이기심을 부추긴다는 말일까?  미국은 자국민들이 이기적이라는 가정하에 국가시스템을 설계했고, 그것은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되었다. 기업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기관은 인간의 행동의 주된 이유가 보상받기 위해서라는 가정하에 상부의 관리를 받는다.

 

연구에 의하면 위계적이고, 처벌적이고 성과 인센티브 기반의 사회시스템은 효과적이지 않다. 벤클러에 따르면 사람들은 협력의 기회를 얻을수록 점점 더 협력의 힘을 믿게 되고 더욱 더 협력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협력하는 인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자기 충족적 예언을 중단한다. MIT대학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하버드대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포용할 줄 모르는 국가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상부의 소수가 정치, 경제에 관련되어 모든 것을 통제한다면 어느 누구도 노력할 이유가 없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국가는 반드시 실패한다. 불평등이 사회 응집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사회의 사람들은 덜 신뢰하고 덜 배려하며, 더 경쟁적이고 더 두려워 한다.이들은 점점 더 고립되고, 스트레스받고 우울해지며, 결국은 불행이 온 사회에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이 평등을 경험할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협력과 협동의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공동체 활동을 통해 서로 협력하고 함께 일하며, 타인을 보살피는 방법을 배운다.

 

경쟁에 대해서만 보상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경쟁할 것이다. 그러나 협력할 기회가 생긴다면 계속해서 협력할 것이다. 서로 협력할 때 더 나은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많이 협력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각자의 믿음체계를 바꾸고 더 많은 희망을 품을 것이다. 희망을 품으면 공공선을 위해 행동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공감, 결속력, 공정성,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