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령에 따른 어려움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현대사회에서 늙어가며 겪는 일은 완전히 내 세상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인도 출신이라 그런지 나이든 식구와 함께 살며 돌봐주고, 말 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 가족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노약자 돌보는 방식은 혼자 살게 내버려 두거나, 개인의 특성을 전혀 고려치 않은 획일적인 시설에 맡김으로써 그들이 정상적인 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간호사나 의사들과 함께 보내도록 한다. 미국에서라면 우리 할아버지의 경우도 요양원에 보냈을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의료전문가들은 개인의 신체 기능에 등급을 매기는 형식적인 분류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에 따르면 8가지 일상생활을 해내지 못할 경우 기본적인 신체 독립성이 결여된 것으로 판정한다. 화장실가기, 밥 먹기, 옷입기, 목욕하기, 머리손질 등 몸단장하기, 침대에서 일어나기, 의자에서 일어나기, 걷기 등이다. 일상의 8가지 독립활동, 즉 쇼핑, 요리, 가사일, 빨래, 약복용, 전화사용, 외출, 재정관리 등을 혼자 하지 못하면, 독립적으로 안전하게 살 능력이 결여된 것으로 판정한다.

 

나의 할아버지 경우 원하는 방식으로 계속 살 수 있도록 가족 모두가 지원하리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현대 사회의 노인중 그야말로 극소수 밖에 누리지 못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가족에게 둘러싸여 임종을 맞으셨다.인류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고령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노후를 보냈다. 여러세대가 함께 사는 시스템, 많은 경우 한 지붕아래 3대가 같이 사는 시스템에서 나이든 구성원은 젊은 구성원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현대 사회에서 고령과 노환은 함께 나눠야 하는 여러 세대의 책임에서 개인의 문제로 변했다. 대부분 혼자 감당하거나 의사와 기관의 도움을 받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 이유중 하나는 고령이라는 것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경우가 흔치 않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전통과 지식, 역사의 수호자로서 특별한 기능을 했다.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집안의 우두머리라는 지위와 권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만큼 나이든 사람에 대한 존중이 두터웠기 때문에 대개 나이를 밝힐 때는 어린척하기보다 나이든 척하곤 했다.

 

1790년 미국사회의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2%도 되지 않았지만, 이제 14%나 된다. 유럽과 일본은 20%가 넘는다. 노인들이 예전에 누렸던 지식과 지혜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도 문자 발명에서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통신기술의 발달로 점점 설 자리가 좁아졌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직업을 낳았고, 새로운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오랜 경험과 노련한판단의 가치가 훨씬 퇴색되어 버렸다. 삶에 대한 정보를 노인에게 의지하는 때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구글을 검색하고,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도움을구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균연령이 늘어나면서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관계가 변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모가 생존해 있으면 나이 어린 가족들이 안정된 삶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안정감, 조언, 경제적 보호 등을 제공하는 원천이 됐다. 그리고 땅을 소유한 부모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부모를 돌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자녀는 집과 땅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훨씬 더 오래 살면서 긴장 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젊은이에게 전통적인 가족 구조는 안정과 보호를 제공하는 원천이라기보다 부동산과 재산, 그리고 심지어 상활방식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결정 상황들을 둘러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세계경제가 변하면서 젊은이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극적으로 변했다. 이제 한 나라의 번영은 젊은이들이 가족의 기대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길을 걸을 용의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있게 되었다. 우리가 인생 마지막 시기를 그렇게 보내지 못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결국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역사적 패턴은 명확하다. 사람들은 기존의 생활방식을 버릴 기회와 자원을 손에 넣는 즉시 떠나버렸다. 자녀들이 기회를 잡기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남에 따라 긴 노후를 보내게 된 부모들은 소유한 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대신 임대하거나 팔기 시작했다. 또한 소득이 늘어나고 연금제도가 도입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저축을 하며 재산을 불릴수 있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혹은 몸을 더 놀릴 수 없을 때까지 일하지 않아도 노후에 경제력을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자녀가 성인이될 때까지 생존하는 부모의 수가 대폭 늘었다. 성년에 이른 후에도 자신이나 자식이 그들의  노후문제를 걱정하기까지 10년 이상을 보내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 부모와 자식 양쪽 모두 따로 사는 것을 자유의 한 형태로 받아들였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미국 65세 노인들중 60%가 자녀들과 같이 살았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에 이르자 이 비율이 25%로 떨어졌다. 이 패턴은 전세계적으로 동일하다. 유럽에서는 10%만이 자식과 함께 살고 있고 절반이상은배우자 없이 혼자 살고 있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들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현대화는 사람들에게 많은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삶의 방식을 제공했다. 거기에는 다른 세대에게 덜 묶여 살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 노인들에 대한 존중은 없을졌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젊음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존중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이 덮쳐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