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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의과대학 전공교재는 '나이들어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않는다. 그 과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었다.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나이 마흔 다섯살인 이반일리치는 상페테르부르크의 치안판사로 항상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자잘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날 사다리에서 떨어져 옆구리 통증을 느낀다. 통증은 갈수록 심해져 일을 할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전에는 지적이고, 세련되고, 활기차고, 상냥한 사람이었던 일리치가 우울해지고, 쇠약해지자  친구와 동료들은 그를 피한다. 의사들이 내린 처방은 하나같이 소용이 없었다. 자신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 일리치는 화를 내기만 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잠자코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때로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몸이 점점 허약해지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극도의 죽음과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의사,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일리치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톨스토이는 계속 말한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난 후,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아픈 아이에게 그러듯이 자기를 동정해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독거리면서 안심시켜 주기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위안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의학지식이 있으면 무슨 병이든 고칠수 있다고 여기고, 의학지식에 대해서만 걱정한다. 어떻게 공감하고 동정해야 할지 알고 있지만,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갖출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방대한 의료기술만을 배우는 것이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어서 대부분의 환자가 가장 중요한 것을 돌보는 데는 실패한다. 환자는 병원에 있고 몸 전체로 퍼져가는 암 때문에 마비를 겪고, 단 몇주 전에 누리던 삶으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없다. 그것을 안전하고 환자가 현실에 대처하도록 돕는 일은 의사들이 할수 있는 일의 밖으로 여긴다. 의사들은 현실을 인정하지도, 환자를 위로하지도, 적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환자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치료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어쩌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주면서. 이반 일리치가 만났던 19세기 원시적인 의사들보다 조금도 나아진게 없다. 더 나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환자에게 새로운 형태의 육체적 고문을 가한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삶을 더 오래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들어 죽어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 되었고, 의료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이 대체로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마지막 단계가 점점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물의 자연스런 질서이기도 하다. 외과의 셔윈 눌랜드 박사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우리 전 세대까지는 자연이 결국 이기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상하고 받아들였다. 의사들은 패배의 징후들을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려 했고,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덜 오만하게 굴었다.’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을 모두 써버리게 만든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실 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부터의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내면서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