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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이라크 전쟁으로 본 미국2

이라크 사람들이 테러세력을 비호하여 이들을 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미군은 비협조적인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즉 테러세력을 숨겨준 것으로 의심되거나 노골적으로 미군을 거부하는 동네를 골라 그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미군 불도저가 재즈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주민들의 생계수단인 과수를 밀기도 했다. 미국에 협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보복한다는 일종의 위협, 즉 주민교육이었다. 수십년전 그들의 선배들이 베트남에서 밀림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정착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거부하는 주민을 본보기로 처벌하던 그런 식이다. 미군의 거칠고 무자비한 진압작전은 이라크인의 반미감정을 촉발했고, 급기야 팔루자에서 이라크인들이 미군의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밟고 뭉갠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이라크 민족주의의 불을 당겨주었다. 이제 이라크 사람들은 후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서 미국과 싸워야 했다. 미군 병사들 역시 적과의 전투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전투, 국가 혹은 거창한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한 전투, 전과를 올리기 위한 전투, 자신이 그 지옥에서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애인을 다시 만나기 위한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적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전, 베트남전 등 미 지상군이 참전했던 수많은 전쟁에서 선배 미군들은 이미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지만, 난생 처음 전쟁에 참전한 소년들은 선배들이 겪은 이 게릴라전의 공포와 악몽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백인 혹은 서구 기독교문명권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점에서 과거 미군이나 현재 미군이나 생각은 동일했다. 지난 19507월초 점령지 일본에서 한가로운 여름을 보내던 18, 19세의 미군들이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 한반도에 투입되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라는 악마를 물리치고 한국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교육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간인들 속에 숨어있는 적들의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공포를 느끼면서, 순진하던 소년병들은 미친 군인이 되었다. 그들이 전쟁 상황에서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군이 움직이는 것은 모두 없애버리려 했던 한국, 베트남, 그리고 오늘의 이라크 전쟁터는 최소한의 도덕조차 실종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냉정하게 보면 1960,1970년 당시에도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북베트남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었다. 미국내 강경파가 주장했듯이 핵을 떨어뜨리거나 융단폭격으로 초토화해버린다면 군사력에서 월등히 앞선 미국이 베트남에 질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왜 제공권을 제압하고 있었으며 화력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미국이 전쟁에서 패하고 결국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전쟁이 게릴라전으로 접어든 다음에는 군사력의 우위가 승리를 보장해줄 수 없기 때문이며, 미국이 지지한 정권이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라 부패한 독재정권이었다는 사실이 전쟁의 명분을 근본적으로 흔들었기 때문이다. 즉 군사적 힘은 수단에 불과하고 정치적, 도덕적 힘없이는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다는 그런 일이 이라크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20043월 미군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이 이라크포로를 잔혹하게 학대한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사실 고문이나 학살 등 국가권력이 개입된 폭력이 말단 군인들의 실수로 발생하는 법은 없다. 문서명령은 없더라도 지휘자들이 이러한 행동을 방조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의자를 다그쳐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라고 요구함으로써 고문과 살해를 조장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하급장교나 병사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임무를 수행하더라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행동은 만연하게 된다.

 

이라크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혹함은 사실상 2002년 말 수립된 미국의 새로운 국방개념,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 조장한 것이며 부시의 이런 군사노선이야말로 실제로는 국외 위험세력에 대한 고문, 살인면허장을 발부하였다. 미국의 일방주의 전력은 누가 테러세력인가라는 규정을 오직 미국만이 내릴 수 있게 만들었으며, 쿠바 지역의 미군기지 관타나모의 포로 억류에서도 나타났듯이 일단 테러세력으로 지목되면 어떠한 법적인 절차나 변호사의 조력도 받을 수 없다. 아부 그라이브 포로 학대 사건에서 우리가 놀란 것은 미군의 잔혹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심각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미국사회 일반의 판단력 마비상태, 도덕적 자제력 상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하던 평범한 촌뜨기 미국남녀를 몇 달 만에 이렇게 이라크 사람을 동물 이하로 다루는 악인으로 변화시켜버리는 상황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인간을 광기로 몰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드러난 수백장의 사진이나 동영상에 담긴 미군들의 잔혹행위에는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초죽음 상태의 이라크 포로들 옆에서, 벌거벗은 이라크 사람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일종이 무공을 기념하는 행위였다. 무엇이 그런 광기를 불러 일으켰을까? 그런 상황은 우선 도덕적 자제력 마비상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선악 이분법. 악을 절멸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적 사고는 미국인들의 머리를 비뚤어진 자기확신, 근거 없는 자기정당화, 우월감, 인종주의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존슨과 닉슨이 베트남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었듯이 부시는 이라크를 또다시 쓰레기더미로 만들었다. 미국의 자유주의가 갖는 이중성과 허구성, 이라크 공격이 얼마나 기만에 가득 찬 것인지 이처럼 적나라하게 폭로된 적은 없다.

 

미군은 후세인정권 아래서 탄압을 받아온 쿠르드족과 시아파, 그리고 미국에 망명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과도통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물론 이 과도통치위원회는 미국의 임시행정처의 지휘를 받는 아무런 독자적인 권한이 없는 꼭두각시 기구다. 미국은 1898년 필리핀에서, 그리고 1945년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러했듯이 일단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미국의 주관하에 선거라는 절차를 거쳐서 새로운 대표부를 구성한 다음 시장경제원칙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헌법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미국은 총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반드시 미국에 우호적인 지도자가 선출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한반도에서 19459월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중장이 이승만을 환영행사 단상에 올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치켜세워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듯이, 이라크에서 미국은 CIA, 그리고 네오콘과 오랜 교분이 있는 찰라비를 과도통치위원회 수반으로 앉혔다. 그리고 치안을 위해 서둘러 경찰조직을 만들었으며 군대창설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제 이라크 사람들로 구성된 경찰과 군인이 이라크주민을 총칼로 상대하게 되었다.

 

후세인 치하에서 고난을 당한 다수파인 시아파조차 미국이 임명한 과도통치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라크 지도자들과 각국에서 온 저항세력은 아무런 자율성도 없는 과도통치위원회, 미국이 창설한 군과 경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의 철수와 조속한 선거실시를 요구하며 시위와 저항을 계속했다. 이라크 점령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찰라비와 미국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찰라비는 결국 미국의 정보를 이라크에 넘겨주었다는 혐의를 받아 집을 압수수색 당했고 미국에 팽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대신 이야드 알라위가 과도내각의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군사적 목표보다 훨씬 더 엄중한 정치적 과제, 즉 이라크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뿐더러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코피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이미 2003년 중반 경부터 하루빨리 선거를 실시해서 권력을 이라크인들에게 넘겨라고 촉구하고,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 테러는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부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저항하는 세력은 대단히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정보당국은 40개 가량 되는 테러세력이 이라크에 집결한 것으로 파악했다.

 

남의 나라 강토를 군사력으로 점령한 다음 주민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베트남전이 교착상황에 빠졌을 때도 미국의 이른바 관변 사회과학자들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위한 각종 이론 모델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점령 사실을 은폐하고 어떻게 좀 더 그들을 완전한 노예상태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점령정책안을 마련해봤자 우리가 여기 와서 무엇을 하고 있지?’하고 날마다 자문하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군인들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애국심을 발휘해서 열심히 이라크민간인들과 친해지려는 군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외세에 대해 적대와 불신을 갖고 있는 이라크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는데도 끝내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