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탐구하기를 통하여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탐구하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앞서 탐구하기는 질문하기라고 했다. 질문이 있어야 탐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차츰 호기심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늘 분주하다. 어떤 법칙과 섭리를 따라 늘 변화하고 늘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우리는 놀랍게도 이러한 세상에 참 무관심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학교나 학원에서 참 많은 지식을 익히고 받아들인다. 지식은 탐구의 지도와 같다고 이야기 했다. 지식이 없다면 아무리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해도, 탐구하기라는 여행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지식은 탐구를 위한 지도와 같아서 어떤 지식을 익힐 때는, 그 지식을 통해 다른 지식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특목고를 가거나 수능시험 점수를 잘 받기위해 지식을 얻으려 한다. 이것은 점수따기에 여념 없는 중고등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취업준비를 하는 대학생이나 논문이나 특허 같은 성과를 올리기에 몰두한 대학교수에게 까지 적용되는 이야기다. 점수를 따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얻은 지식은 우리 마음 안에서 질문을 불러오는 데 한계가 있다.
질문을 불러오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며 장식품일 뿐이다. 죽은 지식은 더 나아가 살아있는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권력이 되기도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1400년간 이어져 오던 천동설이 그 예이다. 천동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전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용되었다. 중세에 인간을 위해 신이 창조한 지구가 당연히 전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굳건히 하기위해 사용되었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 지식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기위해 큰 용기가 필요했다. 지식은 끊임없이 질문을 일으키는 길잡이로 쓰일 때 살아있을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질문이 끊기면 지식은 곧 생명을 잃는다. 중세는 이처럼 변화하지 않는 지식, 곧 죽어있는 지식을 마치 절대적 진리인양 여겼던 시대이다. 중세 때 지식이 생명을 잃은 까닭은 종교의 권위와 신념을 지키는데 지식이 쓰였기 때문이다. 중세에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종교의 자리에 점수나 성과, 돈이 자리 잡는 현재는 어떨까?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탐구하는 데도 돈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국가나 기업이 나서서 돈이 될 만한 탐구주제에 지원하기도 한다. 이처럼 돈이 되는 연구만을 지원하여 탐구할 기회를 준다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는 인간과 주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하기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탐구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탐구의 역사가 있다. 호기심과 질문이 역사이다. 우리 인간과 그를 둘러싼 주변세계를 향해 던진 무수한 질문에 대한 역사가 있다. 바로 과학의 역사다. 과학이 만들어 낸 지식을 인간은 다시 생활에 응용할 따름이다. 나무를 심고 열심히 가꾸어 열매를 따는 것과 같다. 열매를 따먹는 데에 온 마음을 다 빼앗겨서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을 저버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이 심고 길러놓은 나무에 열린 열매를 몰래 훔쳐 먹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좋아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사물들에는 그 사물의 고유한 물성이 잘 묘사되어 있다. 물성物性이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말한다. 그가 그림에 담은 사물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끈기 있게 관찰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물을 끈기 있게 관찰하는 자만이 그 사물의 물성을 바로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찰과 탐구의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관찰과 탐구를 거듭하던 중에 그 대상에 대하여 애정이 생기고 깊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많은 사물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 또 그렇게 애정이 생겨나면 우리에겐 더 많은 질문에 생길 것이다. 자연을 직접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씨앗을 직접 땅에 심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언제 새순이 나오는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새순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자연을 탐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자연과 좀 더 자주 만나고 친해져야 한다. 자연을 자주 접하고 애정을 가질 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고 탐구자의 대열에 설 것이다.
지식들이 담겨있는 이야기를 우리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분명 그 지식들은 두꺼운 껍질에 싸여 죽은 듯 잠자코 있을 것이다. 그래서 껍질 벗기기가 필요하다. 이 지식이 여러분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는 여러 지식도 이렇게 껍질을 벗겨보면 세상과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훨씬 투명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질문을 할 수 있다. 일상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탐구하기와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럴까?’하는 질문을 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 많은가?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흘러 집안의 전등을 켜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멀리 있는 누군가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사람의 힘보다 수천배 센 엔진을 장착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아침저녁으로 통학을 하며, 이 땅 어딘가에서 태어나 자라난 생명체들을 거두어 하루 세계 식사를 하고 물을 마시며, 화석연료의 산화물들이 날아다니는 뿌연 대지의 공기를 들이 마시고, 수십억 년 순환하는 물로 된 비와 눈을 맞거나, 흐르는 강물과 바다를 접하기도 한다. 1년에 한두 번 감기에 걸리거나 가끔 어떤 병에 걸리기도 하고,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자라고, 상처가 나서 곪았다가 다시 낫기도 하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 별을 보고, 바람이 스치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파리와 모기와 개미와 거미와 개가 고양이와 같이 살기도 하고, 꽃과 꽃가루와 낙엽을 보며, 기적처럼 늘 일정한 체온을 지니고 살아간다. 이 모든 일상과 그 현상의 배후에는 앞서 말했던 물질이나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법칙과 원리가 깔려 있다. 따라서 조금 더 애착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지켜본다면, 그 안에 숨어 있는 많은 질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힘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고 있다. 모습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에너지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 힘들은 이 모습이었다가 저 모습으로 바뀌기도 하고 눈에 보이게 들리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가 어느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일상의 무수한 질문을 통해 껍질 벗긴 지식과 서로 만날 때, 여러분은 좀 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주위 사물들의 모습을 그리고 여러분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
기초과학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을 가리키고, 응용과학은 의학, 약학, 공학 등으로 뜻한다. 즉 개인의 생활이나 사회활동에 응용되는 기술들과 연관된 과학을 응용과학이라 한다. ‘응용과학이란 없다’는 파스퇴르의 말은 과학을 두 부류로 나누고 별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세상의 풍조를 비판하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 결과물들을 생활에 응용하려하는 노력이 있을 따름이다.
질문하기란 거창한 일이 아니다. 과학자 같은 전문가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하기, 탐구하기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특별하고 복잡하며 어렵다고 여긴다. 우리는 보통 원리와 법칙이 담긴 지식을 배운다. 열심히 공부하여 그 지식을 이해하고 외우면 그 지식에 담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 발견하는 것은 그 원리와 법칙이 주위 사물들이 나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어떤 지식을 여러분의 세계 속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할 때, 여러분은 그 지식에 담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현미경을 통해 처음으로 사람의 세포를 들여다본 순간 역시 발견을 통한 경이로움과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은 책을 통해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는 깨달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발견이 어느 날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다. 발견이 있기 전까지 앞서 말한 과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많은 관찰과 실험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발견과 관련된 생각을 곰곰이 하고 있었다. 발견은 위대하고 거대한 것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도 이에 견줄만한 발견들이 있다. 우리 조상들이 식혜를 만들고 개량해 나가면서 반복했던 것이 바로 탐구하기라는 점이다. 체험을 통한 그들의 발견은 과학사에 남을 여러 발견 못지않게 소중하고 값지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이러한 발견들을 거듭하며 살았다. 바다와 거의 한 몸이 될 정도로 바다를 생각하는 뱃사람들은 바다와 관련된 자연현상들을 체험을 통해 발견한다. 보름달이나 그믐달이 뜰 때면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커진다는 사실을 뱃사람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조석현상이 달과 주구 사이에 존재하는 힘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바다에 대한 꾸준한 관찰과 체험을 통해 바다의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을 일종의 탐구하기라고 생각한다. 늘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체험하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규칙을 깨닫고 발견한 것이다.
앞서 탐구하기란 놀이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놀이는 사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일생에 한시도 빠짐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 놀이는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크고 작은 세상 사물들과 생명체들과 함께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앞서 말했던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그 놀이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 탐구하기는 놀이 하듯 즐겁게 우리를 포함한 세상을 발견하는 여행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놀이는 친구들과 하는 것이다. 주위의 온갖 사물들과 생명체들이 바로 그 놀이에서 여러분의 짝이 되는 친구들이다. 탐구하기란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가지고 말을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에게 죽은 지식을 껍질을 벗기 시작할 것이다. 여러분의 일상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 할 것이다. 탐구하는 동안 탐구자들은 끊임없이 기쁨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탐구중인 미지의 대상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다. 탐구는 고되고 실패의 연속이기 쉽다.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앞서 올라간 사람들이 뒤따라 오르는 사람들의 친구라는 점이다. 그들 사이에는 먼저 성취한 자의 권위나 통제 그리고 그에 대한 순종 대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우정이 있다. 탐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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