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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한다는 것 (남창훈 )

탐구는 신나고 신비로운 일

사람은 자연학적으로는 한번 태어나고 죽지만 인문학적으로는 여러번 태어나고 죽는다. 우리의 앎과 믿음, 감각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 나를 사로잡던 일도 어느 날 갑자기 시시해질 수 있고, 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산 세상이 오늘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꿀벌은 밀랍으로 자기 세계를 짓지만 인간은 말로써 개념들로써 자기 삶을 만들고 세계를 짓는다. 우리가 가진 말, 우리가 가진 개념들이 우리 삶이고 우리 세계이다. 따라서 삶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일은 항상 우리 말과 개념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하고 또 그것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깨우침과 우리의 배움이 거기서 시작하고 나타난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며 삶을 배우고 세상을 배운다. 그들은 그렇게 말을 배워가며 삶을 만들어가고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만들어 간다. 생각한다는 것, 탐구한다는 것, 느낀다는 것, 믿는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 꿈꾼다는 것, 읽는다는 것... 이 모든 말들의 의미를 다시 물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사실 탐구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 마음에 어떤 의문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고자 애쓸 까닭이 없다. 왜 생명체는 모두 죽을까? 왜 하늘은 파랄까?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떨어질까? 왜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올까? 왜 비가 온 뒤 무지개가 나올까? 왜 달은 모양이 변할까? ... 어린 아이는 쉬지 않고 ?’라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질문을 멈추게 되었을까? ‘왜 하늘은 파랄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곧 하늘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다. ‘왜 더우면 땀이 날까?’ 라고 질문할 때는 사람 살갗과 그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말을 거는 것이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참을성 있게 그 대상이 던져주는 답을 찾아내고 알아채려 노력해야 한다.

 

우열의 법칙,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과 같은 유전현상과 관련된 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을 개척한 멘델이라는 과학자가 있다. 그는 부모에서 자녀에게로 유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러니까 부모의 생김새나 성격, 체질이 어떻게 자녀에게 전해지는가?’라는 질문을 지니고 있다. 멘델은 그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이 살던 수도원 뜰에 3만 그루에 가까운 완두콩을 심고 7년 넘게 관찰했다. 멘델은 수만 그루의 완두콩을 기르고 옮겨 심고 교배하면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에 대해 완두콩들의 대답을 기다린 것이다. 완두콩들은 평상시에도 누구에게 그 답을 들려준다. 하지만 멘델처럼 그 답을 알아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두콩에 대해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뚜렷한 질문을 가지고 탐구대상과 쉼 없이 대화하는 부지런한 탐구자만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질문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어떤 대상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순간 그 대상에 몰두하고 있다는 뜻이다. 호기심이란 애정이나 애착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세상을 탐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침팬지로 유명한 제인 구달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제인 구달은 어머니에게 쥬빌리라는 침팬지 인형을 선물 받았다. 그녀는 쥬빌리에게 온갖 애정을 다 쏟아 부었다, 나아가 들자 그녀는 살아있는 침팬지에게 애정을 돌렸다. 제인 구달은 40년 넘게 탄자니아에서 침팬지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 결과 침팬지의 언어를 이해하여 의사소통할 수 있었고 그들의 무리 생활을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침팬지들조차 나중에는 제인구달을 친구처럼 여겼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는 대상에 몰두할 수 있고 그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다.

 

질문하기는 마치 여행이나 등산과 같다. 길을 찾을 때 물어물어 간다고 한다. 어떤 대상을 탐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면 그다음 질문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단번에 모든 것을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헤모글로빈 구조를 발견한 막스 페루츠는 탐구하는 것을 등산에 비유했다. 산을 오르며 끊임없이 발견하는 다양한 꽃들과 눈을 맞추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에 목을 축이는 모든 과정이 탐구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마치 하나의 줄기에서 수없이 많은 뿌리가 뻗어 나오듯 하나의 답은 또 다른 질문들을 낳는다. 그래서 마치 넓은 강물에 징검다리를 건너듯 험한 산비탈의 돌계단을 오르듯 하나의 의문이 풀리면 그를 디디고 다음 질문을 하게 된다.

 

영국 왕립학회 모토는 다른 사람의 얘기를 그대로 믿지 말라이다. 탐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는 일을 뜻한다. 의심은 마법사의 물과 같다. 의심을 하는 순간 죽어있던 진실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의심만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라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당연한 상식이 되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믿음들이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모두 진실일까? ‘자유낙하를 하는 두 물체 중 더 무거운 것이 더 빨리 땅에 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주장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주장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이 주장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모든 물체는 그 무게에 관계없이 똑같은 속도로 자유낙하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코페르니쿠스는 역시 누구나 믿고 따르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 즉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지동설을 통해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임을 밝혀냈다. 이처럼 탐구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잘못된 믿음에 의심을 품고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입증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뜻한다.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미지의 곳에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용기, 순발력, 뛰어난 두뇌... 용기나 두뇌만큼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논리는 당신을 A다음 B로 가도록 해 준다. 하지만 상상력은 당신을 어떤 곳으로든 다 인도해준다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원자만큼 작은 것부터 우주만큼 큰 대상까지 우리를 둘러싼 많은 사물 가운데 우리가 눈, , 귀로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을 탐구할 때 상상력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한다. 사물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들에만 매달리지 않고, 상상에 빠져야 한다. 상상은 어두운 등산로를 비추는 불빛과 같다. 그 불빛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만들어 놓은 등산지도의 끊긴 길들을 조금씩 이어갈 뿐 아니라, 간혹 잘못된 길을 바로 잡기도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유럽의 대도시들을 여행하다보면 성당이나 시청과 같은 크고 오래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식에는 사물 안에 감춰진 사실을 드러내는 돋보기와 같은 힘이 있다. 또한 지식이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을 일컫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미 가 본 곳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 지도이다.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에게 이전 과학자들이 밝혀놓은 지식은 돋보기나 지도와 같다. 지식이 없어도 자연 속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탐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 없다면 아주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고 탐구를 하는 과정에서 쉽사리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1990년부터 2003년까지 휴먼프로젝트라는 큰 규모의 탐구가 국제적으로 이뤄진 적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모두 다 분석하는 일이었다. 염기서열을 모두 알게 되면 우리 몸을 이루는 단백질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다. 많은 언론이 그 일에 참가한 과학자들의 첨단기술에 대해 찬탄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일이 이전 과학자들이 탐구로 그려 놓은 거대한 지도 위에 작은 길 하나를 덧붙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지식에 너무 얽매인다면 우리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탐구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지도는 꼭 필요하겠지만 지도에 표시된 길이 잘못되었다면, 자기 눈으로 발견한 길로 고쳐 그릴 줄도 알아야 한다. 또 아주 심한 경우에는 잘못된 지도를 통째로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탐구를 하다보면 자연과 인체의 신비에 놀라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소풍가서 보물찾기를 할 때 풀숲 어딘가에 보물을 찾았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인체와 우주에는 찾아도 찾아도 끝없이 놀랍고 신비로운 법칙들과 현상들이 있다. 재미가 없는데 억지로 하면 놀이가 아니다. 탐구하기는 우리가 모르는 사실들을 퍼즐 풀 듯 하나둘씩 풀어가는 즐거운 놀이를 닮았다.

 

아름다움이 곧 진리다.’ 영국의 시인 키츠가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산을 오르며 많은 꽃과 나무, 예쁜 새와 시냇물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거나 개척하고 험한 길을 오르는 과정에서 등산의 매력을 느낀다. 탐구는 진리를 추구하는 등산과 같다. 우리 몸과 땅에서 자라는 아주 작은 들풀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우주 가운데서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과학탐구를 통해 이 세상이 얼마나 굳건한 원리와 법칙 속에서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답게 유지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얘기한다. 이 말에는 사람이 지구상에서 다른 모든 생명체와 물질들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연을 알아야 한다. 자연을 알기 위해 과학 탐구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첨단기술과 장비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연구되고 개발되고 있다. 이런 생각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인간이 다른 자연을 정복하여 지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인간의 수요에 맞춰 자연을 관리하는 것은 인간의 입장과 이익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와 관리를 통해 무시되는 것은 사육되는 가축들의 입장이나 이해관계만이 아니다. 지금 인류는 대규모 축산과 경작을 통해 전 인류의 두 배가 넘는 숫자를 먹일 수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해 내지만 시간당 4천명의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 또한 지구인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10억 명 정도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린다. 100년 전에 비해 인간은 더 강력하게 자연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많은 수의 인간은 자연 앞에 더 무기력해져 버렸다. 이 문제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이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이 보여주듯 지구는 아주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간 탐구하기가 마치 인간의 정복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인간만을 위하여 이뤄지는 탐구라면 이 세상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파괴할 수밖에 없다. 탐구하기는 이런 상황에서 인간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밝히고,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