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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 고병권)

생각하는 기술, 철학

 

잘 살 수 있는 기술, 그게 철학이다. 철학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없다. 오히려 돈은 없는 데도 잘 사는 사람들은 많다. 너희 집 잘 살아?’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무슨 뜻일까? ‘너희 집 돈 많아?’ 이런 뜻일 것이다. 잘 사는 것과 돈 많은 것과 같은 말일까? 돈이 많고 적은 것과 잘 살고 못사는 것은 무슨 관계일까?

 

무언가를 자기만 가지려 하는 사람은 결국 그것밖에 가질 수 없다. 내가 내 것을 고집하면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서로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 가진 것을 나누어 친구가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부자가 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신과 친구이기에 모든 물건을 굳이 자기 것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다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자기 것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부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재산이 없어도 세상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살기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 한다. 하지만 잘 살기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다보면, 나중에는 돈을 벌기위해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돈 벌어 잘살겠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돈 버느라 잘 살지 못할 때가 많다. 행복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어떤 떼는 돈을 벌기위해서 행복을 포기할 때도 많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잘 살기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그 잘살아보겠다고 벌인 일이 오히려 자기 삶을 망칠 수도 있으므로 잘 사는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철학은 여러 기술 중에서도 특히 생각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살기위해서는 우리에게 생각 좀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들이 잘 산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롭게 산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기 위한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전기장치를 잘 고치고, 어떤 사람은 집을 짓는 데 선수고, 어떤 사람은 공을 잘 차고, 어떤 사람은 헤엄을 잘 친다. 기술이란 무엇을 만들거나 잘 고치는 기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는 기술도 대단하다. 농부가 생명을 키우고 예술가들도 기술자다. 우리는 기술자와 예술가를 구분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구분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가꾸는 일 모두를 그냥 기술이라 불렀다. 철학도 일종의 만들고 가꾸는 기술이다. 그런데 철학은 컴퓨터도 피아노도 꽃도 아니다. 바로 삶 자체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말은 자기 능력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 채 죽는다. 난 아직 어리니까. 난 몸이 약하니까.. 이런 식으로는 우리는 너무 빨라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해낼 수도 있었을 많은 일들을 내버려둔 채 삶을 마감한다. 삶을 가꾼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한 우리의 능력들을 마음껏 펼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능력자들임을 깨닫는 일이다.

 

인류학자나 생물학자들은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인류와 구분하여 현대 인류를 지칭할 때는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은 생각하는 인간,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 우리 호모사피엔스들은 정말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는 인간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별 생각 없이 사는 일이 많다. 그럼 이제부터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했다. 쉽게 말하면 아주 평범한 사람도 악마가 될 수있다는 말이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시대에 수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잔인한 살인마라고 욕했다. 그는 왜 끔찍한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것일까? 그는 단지 명령받은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성실히 해낸 일이란 게 무엇일까? 그것은 잔인하게도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든 일이었다. 그는 아주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부지런함을 탓할 수 없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는데 있다. 즉 아이히만은 너무 성실한 공무원이었기에 악마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 즉 유대인들을 죽음의 장소로 이동시키라는 웟사람의 명령을 너무나 성실하게 따랐던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경우를 보면 악마란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주어진 일을 기계처럼 무조건 했던 것이다. 생각이 없으면 우리도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 일사 분란한 명령을 중시하는 군대에서는 사실 병사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지내야 한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고향에서는 훌륭한 시민이었겠지만 전쟁터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무리 착은 사람도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오래 지내다보면 언제든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하며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보통의 경우엔 별 생각 없이 산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떼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생각하자고 말할 때 그것은 다시 생각하거나 달리 생각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명령에 따라 생각하는 것, 과거에 해 오던 대로 생각하는 것, 자기 편견에 빠져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간을 호모사피엔스 즉 생각하는 인간이라고 했다. 정말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일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해야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한다기보다 간혹 생각하는 것 같다. 왜 기억나는 게 별로 없을까? 아마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또는 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것이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것, 우리가 습관처럼 해 왔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존재한다는 말은 너무 애매하고 어렵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하면 있다정도가 될 듯하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있다는 의미다.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이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갖고 있다는 말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내가 가진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예전에 그런 생각을 본 적이 없다이것이 바로 생각이다. 공을 차는 여자아이를 보고 무슨 여자가 공을 차냐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여자와 축구가 되는 순간 잘못된 출력이 나온다. 생각했다기보다 반응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의심해 보는 일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왜 그럴까?’라고 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을 마주칠 때 그때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철학자 니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니체는 모두가 옳다고 확신하는 말들에 딴죽을 많이 걸었다. 니체는 네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한다. 니체는 우리 이웃 사랑에 나쁜 점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내 주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들끼리 뭉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끼리 뭉치면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왕따가 된다. 지역감정은 자기 동네 사람끼리만 친하고, 다른 동네 사람들은 미워하는 감정이다. 너무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이 아닌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니체는 나에게 익숙한 것에서 떠나 보라고 했다. 우리는 이때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기 위해, 즉 다르게 생각하고 새롭게 생각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모습에서 떠나 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으로부터 떠난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다. 여러분이 난 여기까지, 여기가 내 한계야라고 믿는 그곳에서 시작하자. 여러분이 가보지 못했던 곳, 여러분이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 여러분이 싫어했던 책이나 음악을 만나보자.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여러분에게 다른 생각을 낳아 줄 것이다. 정리하자면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을 낳는 것, 즉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것, 낯선 것과 마주하는 것, 스스로 한계라고 믿었던 데서 한 발 더 나가보는 것, 이 모든 게 생각을 맞이하는 준비다. 생각은 그때 우리에게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