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만큼 정통성을 따지는 민족도 없다. 중국의 역대 한족漢族 왕조들은 언제나 개국 초기부터 이전 정권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전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국이 원래 농경사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농경민족은 유목민들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지 않고 정착해 살아간다. 중국 민족이 최초의 조상으로 받드는 인물이 황제黃帝다. 직위로서 皇帝가 아니라 특정 사람 이름이다. 그는 동이족의 치우와 싸워 이겨 중원의 비옥한 평원지대를 정복했는가 하면 안으로는 문자와 역법, 화폐, 수레 등을 발명하고 보급했다. 추측하자면 황제는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시 존재했던 지배 집단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건국 신화에 해당하는 三皇전설이 있다. 삼황이란 신농씨神農氏 복희씨伏犧氏 수인씨燧人氏를 가리키는데 신농씨는 농경을 발명했고 복희씨는 수렵술을 발명했으며 수인씨는 불을 발명했다. 이 삼황이 문명의 기반을 닦았고 그 토대 위에 황제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삼황은 인류역사의 시작이고 황제는 중국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황제 다음에는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의 네 임금이 중국을 다스린다. 이 다섯 임금을 오제五帝라고 부른다. 오제 시대가 끝나는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년 무렵이다. 그런데 황제는 기원전 28세기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오제는 다섯 임금이라기보다 다섯 개의 왕조였을 것이다. 요순시대 통치 덕목 가운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선양禪讓제도이다. 요임금은 백성들 사이 신망 높은 순을 발탁해 여러 시험을 치른 끝에 왕위를 넘겼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항상 요순시대의 전통인 선양을 꼽는데도 몸소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치수사업공적으로 선양을 통해 순임금 뒤를 이은 우임금에 이르러 중국은 역사의 시대로 접어든다. 역사무대에 등장 중국의 첫 고대국가가 하夏나라다.
하나라는 황허중류에 자리 잡고 사姒씨 성의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였다. 건국자인 선양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하나라만이 아니라 은나라까지도 언제나 왕위가 부자간 세습된 것은 아니다. 당시 전 세계 문명 가운데 왕위세습이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한 나라는 이집트 정도였다, 여러 씨족과 경쟁하거나 연합하면서 존속하던 하나라는 기원전 18세기 중반에 상商이라는 성씨를 가진 씨족에게 멸망당했다. 상족 왕인 탕湯은 새로 은殷나라를 세웠는데 하나라가 기록에 전하는 최초의 국가라면 은나라는 유물로 실증되는 최초의 국가다. 은나라 유적에서는 각종 청동기와 도기, 석기, 농구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지만 역사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갑골문자다. 갑골문의 내용은 점괘였다. 은나라는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하던 제정일치의 신정神政국가였다. 당시 종교는 개인이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방식이었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사항이 있을 때 은나라 지배집단은 동물 뼈의 한 면에 홈을 판 되 제사를 지내고 그 뼈를 불에 구었다. 그 결과 갈라진 무늬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판독해 하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은나라 초기 왕이 직접 제사장 자격으로 점괘를 해석했으나 점차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고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후기에는 정인貞人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무당이 그 일을 대신하고 해석의 결과만 왕에게 보고했다.
하나라와 은나라 말기의 현상은 매우 비슷하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은 말희라는 미녀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왕은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진 폭군이었다. 이전 나라의 마지막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중국 역대왕조의 특기이기도 하다. 새 왕조 건국자 치고 역사에 인품과 지혜를 갖춘 인물로 기록도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주족周族은 은나라 말기인 기원전 12세기 무렵 은나라 서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씨족이었다. 그들을 경계한 주왕은 주족 문왕에게 서백이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문왕은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은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던 차에 문왕이 죽고 아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기원전 111년경에 주나라를 세웠다.
주나라 때부터 왕국 성격이 뚜렷해지고 체제도 견고해졌다. 사실상 중국의 첫 왕조나 다름없었다. 은나라는 사라졌으나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으나 문화적으로 선진국인 은나라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무왕은 은나라 옛 지배집단을 회유하기 위해 옛 영토를 나누어 주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게 했다. 감시가 따르지 않으면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 무왕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은나라 잔존 세력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중국의 봉건제 기원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게 되었고 그의 통치시기에 주나라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주나라 왕실은 주변제후국들에 다양한 작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제후국들은 정기적으로 주나라 왕실을 방문해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자기지역의 생산물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공朝貢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공은 중국 역대 왕조의 주요한 외교/무역 수단이 된다. 주나라는 이웃나라들과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제후국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주나라 초기 제후국들은 100개가 넘었는데 그 가운데 주나라 왕실의 성씨인 희姬씨 제후국이 3분의 1이상이었다. 당시는 제후국이라 해도 국경개념이 없었고 도시국가였다. 제후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읍을 조성하고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았는데 이를 국國이라고 불렀다. 제후국들도 나름대로 혈족을 바탕으로 지배집단을 구성했다. 제후 휘하에 대부大夫, 사師의 관등 위계를 두어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으며 토지를 분배했다. 경제적 생산을 담당하는 것은 농민과 노예들이었다. 농인은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납부했다. 공동체적 경작방식으로 정전법井田法이 주나라를 대표하는 토지제도다. 농민들을 그밖에도 귀족을 위한 각종 노역을 담당해야 했다. 조세와 부역 이 두 가지는 점차 제도화되면서 고대국가의 재정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주나라는 건국할 때부터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강조했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한 것은 천명이라는 것이었다. 천명을 받은 주나라 왕은 하늘의 아들 天子다. 천자를 받드는 제후들은 북극성 주변을 따라 하늘을 도는 별처럼 하 가운데 있는 천자의 나라를 예로써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법으로 정해진 질서 즉 종법 질서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주변이 된다. 주나라라는 천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제후국들의 관할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모두 오랑캐가 되었다. 이것이 중화사상이며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주양이尊周攘夷 혹은 존왕양이尊王攘夷 라는 중국적 전통의 시작이다. 이렇게 중국적 유교질서의 싹은 주나라 봉건제에서 비롯되었다.
주나라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 종법봉건제가 문제없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주나라 중기를 넘어서면서 중원 바깥지역의 이민족 나라들이 끊임없이 침략해왔다. 대개는 중원의 북쪽과 남쪽에 세력기반을 가진 나라들이었다. 당시 문헌에는 이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夷 융戎 만蠻 적狄 등이다. 오랑캐라는 의미다. 춘추전국시대를 접어들게 되면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부르게 된다. 하나라의 말희, 은나라의 달기와 마찬가지로 주나라 유왕幽王에게 포사가 있다. 유왕은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유왕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세력은 북쪽의 견융犬戎을 끌어들여 주 왕실을 공격했다. 견융이 물러가지 제후국들은 평왕을 옹립擁立했다. 평왕은 견융이 쳐들어올까봐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역사학자들은 이전의 주나라를 서주, 그 이후를 동주라고 구분한다. 주의 동천東遷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 시대는 약 550년간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를 가리키는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된다. 춘추시대는 주의 동천에서부터 당시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晉이 분열되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키며, 전국시대는 이때부터 중원서쪽의 강국인 진秦이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이다. 춘추와 전국은 문헌에서 따온 명칭이다.
춘추시대 후반기를 통해 초, 오, 월 같은 남중국 왕조들이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원래 중국문명은 황허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에서 탄생했으며 주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북중국이 문명의 적통이 되었다. 춘추시대를 지나면서 양쯔강 이남의 남중국 지역까지 자연스럽게 중원문화권이 된다. 17세기 만주족의 청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주가 중국의 강역에 포함되기까지 2000여년 동안 중국이 역사는 춘추시대에 정해진 경계를 무대로 해서 전게되는 것이다. 춘추시대 이후로 오랑캐라는 말도 남중국과는 무관해지고, 고비사막 너머 몽골지역과 서북부 변방의 북방민족들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 막이 오르게 된 계기는 남방의 초와 대립하던 강국인 진晉이 와해된 것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진은 한韓 위魏 조趙 세 성씨의 세력가들에게 분할되었다. 춘추시대 5패가 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했던 나라들은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7웅이란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진秦 초楚 일곱 나라다. 춘추시대 전쟁은 주로 각국의 지배귀족들 간에 벌어졌지만 전국시대에는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이 임했다. 춘추시대에는 적국을 복속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지만, 전국시대에는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목적이었다.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바뀌어 더욱 잔인해졌다. 진秦의 효공은 위나라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상앙을 받아들여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과 쇄신을 단행했다. 가족제도에서 군사, 조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도를 개선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이 이루어졌다. 진은 일약 강국으로 성장하여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대륙 전체를 통일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발전이 있었다. 사회적 변화보다 큰 의미를 지닌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활동한 수많은 술사와 책략가는 정치사상을 크게 성숙시켰다. 이 시기에 생겨난 각종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동양사상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를 諸子百家의 시대라고 한다. 그 이후 수천 년간 동양철학은 춘추전국시대에 토대가 확립된 사상을 해석, 재해석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서양의 정신세계도 이 무렵 골격을 갖추었다. 서양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그리스 고전철학 역시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7세기부터 4세기까지에 걸쳐 완성 되었다. 탈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그리스 철학자들의 활동기간은 공자, 맹자, 장자 등과 거의 일치한다.
유가를 창시한 공자는 노나라 태생이다. 춘추시대 말기 유서 깊은 제후국에서 성장한 공자는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몸에 익혀 가지고 있었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라는 말을 쓴 사람도 공자이다. 그가 염두에 둔 과거는 요순시대가 아니라 전대인 주나라시대였다. 서주 시대 전통적 가치는 주나라 건국이념이라 할 예禮의개념으로 집약된다. 이 예의 사상이 종법봉건제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공자는 그 예에다 仁의 사상을 더했다. 예와 인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의 기본골격이 생겨났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맹자와 순자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으로 확장하는 한편 공자가 제시한 인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중점적으로 모색했다. 흔히 유학은 현실과 유리된 관념철학으로 여기지만 그 발달과정에서 보듯이 현실정치에 대한 큰 관심에서 시작되었고, 항상 국가의 통치철학으로 기능하려 했다. 유학의 권력 지향성은 수백 년 뒤 한漢 대에서 구현되었고 역대 중화제국의 기본이념이 되었으며, 15세기 이후 한반도 조선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법가사상은 혹독한 군주독재정치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군주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법가는 철저한 우민정책과 사상통일을 강조했다. 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생매장한 진시황의 만행에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道家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철학적 냄새가 강하다. 세상에 존재 하는 만물은 有다. 유는 경험세계에 존재하며 그 존재를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를 만드는 것은 無다. 유는 무에서 생성되어 운동하다가 다시 그 근원인 무로 돌아간다. 우주만물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관장하는 것이 道다. 도는 사람이 도구를 다루듯 의식적으로 집행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법칙이다. 이 道의 작동원리가 무위無爲다.
'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사- 일본1 (0) | 2023.11.30 |
---|---|
동양사-인도1 (2) | 2023.11.25 |
종횡무진 동양사 프롤로그 (0) | 2023.11.05 |
한국사 에필로그 (1) | 2023.11.05 |
한국사 11 (0) | 2023.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