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시대에는 개인의 형성 가능성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기준은 경제적 성공이다. 생물학과 유전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정체성은 우리의 유전자에 숨어 최강자가 승리를 거두도록 보살핀다. 우리의 정체성 발달은 유전의 결과인가 아니면 환경, 즉 교육의 영향인가? 오늘날의 지배적 사고방식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기보존과 번식에 토대를 둔, 시간을 초월한 진화의 자연도태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걸로 끝이다. 이런 관점에선 규범과 가치란 없으며, 있다해도 문화적 현상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놀랄 정도로 명쾌한 이런 정의는 자기보존의 이 자기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순간 갑자기 명쾌함을 잃고 만다. 자기란 종種을 의미할까? 아니면 개인? 아니면 유전자?
우리 인생이 일종의 백지상태에서 시작된다는 장반대의 입장은 우리의 막강한 적응력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를 정체성, 규범, 가치의 차원에서 논하는 심리학적 시각에 기초를 둔다. 계몽주의 사대에는 적응력은 물론 다양성의 원천 역시 전형적인 인간의 능력, 즉 의식적인 결정과 의도적인 변화를 이끄는 이성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백지라고 확신하는 심리학의 방향은 전통적으로 진보적 사고 모델로 불린다. 우리는 프랑스 정치학자 도미니크 모이시가 ‘ 감정의 지정학’에서 설명한 대로 국제관계가 감정에 기초를두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또한 경제가 이성적 계산으로 운영되는 거라고 굳게 믿는다. 언어는 두말할 것 없이 유전적 기초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는 절대 말을 배울 수 없다. 실현되는 환경에 따라 본질적인 특성들이 전혀 다른 현상, 형태를 띨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서나 교육이 일어나고 또 유전자의 영향을 받지만 교육의 종류는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본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필연적 결론이다.
모든 것이 환경의 결과물이며 무엇도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믿기에 모든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언가가 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자신도 선택권을 갖는다는 백지론을 펴는 이들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수 있겠다. 현실은 이론보다 복잡하고 미세하지만 더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나치를 사회진화론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집단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강해 최신 버전의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신자유주의가 일방적으로 생물학을 제멋대로 전용한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포유류는 작은 인형안에서 더 작은 인형이 숨어 있는 러시아 마트로시카 인형과 같다. 옛날의 특징들이 그대로 유지되지만 새로운 특징들로 인해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영장류의 특징은 대부분의 경우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하지만 인간에게서는 영장류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특질들이 확인된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 언어이며, 이와 결합된 사고력과 의식, 이로부터 나온 의지의 자유를 들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를 거쳐 발달한다. 고독한 존재 인간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집단을 선택하려면 오직 이성이 있어야 한다. 물론 조건이 따라 붙는다. 조건은 계약의 형태를 띠며, 계약에 동의한 사회질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개인이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생물학은 우리가 무리 동물이며 혼자 살아가는 개인은 병이 들거나 배척 당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배척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추방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숲에서 고독하게 사는 고귀한 야만인 이미지는 낭만적이지만, 실제로는 낭만적이지 않다. 영장류들은 항상 위계질서가 엄존하는 집단에서 살고, 해당 집단내의 사회관계는 생존과 번식에 매우 중요하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의식적으로 사고할 시간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이성은 나중에 우리의 자동적 반응을 설명할 적절한 이유를 공급할 뿐이다. 스스로가 이해가 안되는 일, 심지어 수치스러운 일을 나중에 정당화 하는, 합리화라는 말이 합리성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앙리 베르그송이 창시한 생기론vitalism은 인간이 유인원과 공유하는 지성의 형태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어쨌든 우리는 정서적 기초와 관련된 지식을 굳이 애써 배우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활용한다.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집단기억, 집단 무의식에서 나온 지식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입각한 현대 특수 용어로는 특정한 반응이 ‘사전에 배선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데뷔도 하기 전부터 이미 전선이 연력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이다. 사실 이 두 개념, 무의식적 지성과 미리 프로그래밍된 행동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비유에 불과하다. 흔히 영장류의 행동은 생존투쟁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영장류는 매우 공격적이고 서로 싸우며, 새끼를 죽이고 동족의 고기를 먹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킬러원숭이의 이미지는 그사이 무리문화 자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영장류의 무리에서 지배와 공격을 특징으로 하는 강력한 위계질서가 존재함을 입증한 연구결과는 충분히 많다. ‘모두가 동등하다’는 나긋나긋한 관념이 입증된 경우는 한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안정된 권위와 결합된 위계질서는 안정을 보장한다.
영장류의 상호이타적 행동, 나아가 다른 종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입증하는 증거도 수없이 많다. 식량찾기에서 부터 새끼양육과 안전보장을 거쳐 곤경에 빠진 다른 동물들에 대한 즉흥적 도움에 이르기까지, 이타적 행동의 반경 또한 메우 넓다.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영장류들은 식량이 남으면 친척이나 친구에게 남은 식량을 나누어 주고, 그걸 받은 동물은 다시 일부를 떼어 다른 동물에게 나누어 준다. 시냥감은 사냥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하여 분배한다. 그러니까 위계질서에 따라서만 분배하는 것은 아니다. 지위의 차이와 식량분배의 차이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만 인정된다. 학자들이 개입하여 특정한 배치를 만들어 내거나 번형시킬 경우,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예를들어 특정한 과제를 수행한 원숭이에게 보상으로 먹을 거리를 주는 것이다. 두 원숭이에게 같은 과제를 주고 상으로 오이를 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한쪽에게는 더 맛난 음식을 주고, 다른 한쪽에게는 똑같이 오이를 주면 후자는 협력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오이까지 받지 않는다. 공평하지 않는 배분은 거부당한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상으로 먹을거리를 살 수 있는 플라스틱 동전을 주었다. 동전은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먹을거리를 살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다른 동료에게 먹을거리를 사줄 수도 있다. 원숭이들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후자의 동전을 선택했다. 상대와 아는 사이라도 실험구조상 서로를 볼 수 없게 해놓으면 역시나 나누어 먹는 횟수가 줄었다. 그러나 상대 원숭이에게 더 많고 더 좋은 음식이 돌아갈 경우엔 자기만 먹을 수 있는 동전을 택했다. 이렇듯 원숭이들은 서로 나누고 서로에게 선물도 하지만 분명 그들의 자선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실험들은 시선교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가르쳐준다. 동료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교환 의지도 줄어든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앞에 앉아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매우 불리한 결정을 내리라고 하면, 눈에 보일 때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그렇게 한다. 현대식 전쟁이 바로 그렇다. 모니터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컴퓨터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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