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초기단계에서는 기대가 높았다. 과학의 인식이 역사상 최고의 사회를 선사할 것이라고 모두들 기대했다. 그들의 중심사상은 간단했다. 인간에게 해가 되면 틀렸고, 인간에게 행복을 주면 좋다. 그들의 목표는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제러미 밴덤의 말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었다. 선과 악을 결정할 신이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보상을 받거나 벌을 받기위해 내세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성과 열정과 공감이다. 이 세가지가 세속화된 사회를 떠받칠 기둥이라 보았다. 열정은 추동력이며, 열정을 조종하는 것이 합리성이며, 공감은 척도가 되어 합리성을 떠받친다. 볼테르와 루소는 낭만적 자연관안에서 종교와 이성을 결합한 그들의 순화된 사상은 프랑스혁명이후 세속화 된 국가종교로 칭송 받았고, 이성은 최고의 자산, 최고의 신으로 추앙 받았다. 교회가 담당하던 기능이 이성의 성전으로 넘어가면서 프랑스공화국의 이데올로기가 과거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다. 여러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서로 자기만 옳다고 싸움을 시작하면, 종교나 이성의 이름으로 종교전쟁 혹은 이데올로기 전쟁이 시작될수 밖에 없었다.
계몽주의가 강조한 이성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계몽주의의 이성은 그리스 원래 사상과 비교할 때 그 의미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그리스인들은 개인의 삶도, 사회도 당연히 지적인 덕목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자란 삶의 기본문제에 해답을 찾아가는 사람이기에 학문 자체에 가치가 담겨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식에 대한 견해를 두권의 윤리책에 실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식은 윤리에 종속된다. 가치없는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열정없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우리의 수업은 능력 지향성을 띤다. 모든 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적이다. 증거에 기초한 학문은 점점 더 종교의 몸짓을 취한다. 여러집단들이 상반되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모두 자기가 옳다고 확신한다. 종교의 자리에 학문이 들어섰다.
종교와 과학주의 둘다 개인에게 분열된 정체성을 안겨준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쁘고 죄가 많다. 혹은 비합리적이고 능력이 없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얻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일해야 한다. 무지한 인간들은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여 이성을 얻기위해 부지련히 공부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심리치료도 받아야 한다. 오늘날 합리주의자들은 과거의 낭만주의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열정에 도취하여 확신을 찾았지만 합리주의자들은 숫자에 기초한 이성안에서 확신을 찾는다. 하지만 둘다 미성숙한 형태라는 사실은 각각의 양극단인 히스테리와 강박노이로제를 보면 잘알수 있다. 종교와 과학주의는 다른 견해들에 비해 극도로 비관용적이다. 둘다 자신의 시각만 옳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신에게서 오기 때문에, 과학주의는 자연과학적으로 입증되었기에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다. 둘다 무지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가 옳다고 믿는다. 과학, 학문전쟁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로 은폐된 토론과 다르지 않다. 지난 세기의 종말은 동시에 급진적으로 새로운 정체성 개념이 등장했음을 알린다. 너는 너 자신이 창조해야 하고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
20세기의 마지막 25년동안 사회진보에 찍혔던 방점이 개인의 형성 가능성으로 옮겨갔다. 새천년이 시작될 즈음 자기자신의 경험은 자기자신의 창조가 되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몸이다. 피트니스 클럽을 가고 성형수술을 한다. 영원한 젊음과 섹시한 몸이 메시지이다. 특정한 심리장애도 급증했다. 자해와 섭식장애, 우울증, 인격장에 같은 것들이다.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만 개인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쏟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더불어 전통적인 정당간 정책대결은 사라지고, 국민이 선출한 사람들은 증시에 조종 당하는 경제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착실하게 춤을 춘다.
1987년 10월 31일자 ‘우먼스 오운’과 했던 인터뷰에서 마거릿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 내 생각에 과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돌봐주는 것이 정부의 임무라 생각햇습니다. '어려움에 처하면 지원받을거야, 집이 없으면 정부가 잘 곳을 마련해주어야 해',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사회로 떠밀었지요. 하지만 사회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각각의 남자와 여자, 기족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우선 스스로를 도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스스로 돌보는 것이 우리 임무입니다. 다들 너무 요구만 생각하고 의무는 잊고 살거든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마거릿 대처의 정치적 발언 중 하나이다. 그녀는 이 말을 실천에 옮겼다. 사회의 해체는 서서히 공동체 의식을 무너뜨린다. 개인은 점점 더 경쟁자가 되어간다. 능력에 따른 임금 덕분에 가장 열심히 일한 자에게 가장 많은 대가가 돌아간다. 자기자신의 경험은 자기자신의 창조에서 성공으로 이동한다. 개인은 해방 되었고, 아무 방해없이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유는 극도로 상대적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최신버전의 사회진화론이 귀환했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도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개인을 노린다.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을 희생시켜 성공을 일구어내는 자가 가장 강한 남성 혹은 가장 강한 여성이다. 판단의 기준은 성공이다. 이번에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비유를 거론한다. 유전자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따라서 반칙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반칙도 유전자에 새겨진 글자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 이런 이동은 책임에도 비슷한 방식의 변화를 몰고 왔다. 생존투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의 책임이 바로 거기있다. 사회는 절대 내 앞길에 걸림돌을 놓아서는 안된다. 사회는 만인에게 모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최고가 승리할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성공하지 못한 개인을 지원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정상이다. 그들의 실패는, 오로지 자기자신의 책임이다. 가혹한 운명도 이겨낼수 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자기책임이다. 판단의 기준은 성공과 그에 따른 권력이다. 권력은 새로운 생활감정을 표현하는 두 단어, 경제적 성공과 재정적 권력으로 이해된다. 윤리적 차원에서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난다.
돈 많은 사람은 모두 노력과 자기능력 덕분이므로 인성도 훌륭하다. 따라서 윤리의 사다리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렇듯 재정적 권력이 도덕적 권력과 같은 뜻이기에 이제 우리는 사회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은행가나 기업체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를 돌아보자. 그 시대엔 최고의 자기인식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우수함과 지혜를 공동체에 제공하는 사람이 최고의 지도자였다. 기독교 시대에는 신이 수장을 선택했고 선택된 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나쁜점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다. 계몽주의는 사회윤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진화론은 변화가 당연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사회진화론의 최신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자연 대신 시장을 보존하려고 한다. 바탕에 깔고 있는 논리는 같지만, 어떤 경우에도 숫자와 도표로 중무장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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